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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Oct 23. 2023

불량품들의 사계

풀치와 나와 성길씨 24

풀치와 나와 성길씨



                         

풀치가 밤새 내 이름을 불렀다며 성길씨가 문을 꽝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풀치가 내 이름을 불렀는디 왜 지가 화를 내는 것이여?” 지금 집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여 뭐여.     


고향 친구들 명희 영아 진녀 인순 유숙이랑 팔당댐 근처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집으로 왔다. 차에서 내려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평상 밑에 자빠져 있는 것이 꼭 풀치 같았다. 다가가서 보니 정말 풀치였다.

몸집이 큰, 겁먹은 검정개 한 마리가 평상 다리에 쇠줄로 칭칭 묶여있었다. 햇빛을 피해 평상 밑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있었다. 나는 순간 이 개, 내가 맡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밀려왔다. 친구들은 풀치의 존재를 말로만 듣다가 현장에서 처음 보았는데도 별말들이 없었다.

“내가 누님을 사랑해요” 말을 하고 풀치는 자기 나이도 말했다. 그녀들은 풀치를 제부라고 불렀다. 친구들은 재밌다고 웃으며 개에게 물을 주었다. “야들아! 일 크게 맨들지마라. 지금도 날마다 저 꼴을 보고 사는디”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하지만 풀치가 배시시 일어나 큰 소리로 떠들자 놀라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고양이 주려고 싸 온 삼겹살을 개한테 줬다. 검정 개는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오월 말이지만 햇빛이 강렬했다. 나는 멀찍이 비켜서 줬다. 풀치는 한참이 지나도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안 가고 버틸 것 같아 나는 산으로 피했다. 어둑어둑해져 집으로 들어와야 할 것 같아 나는 성길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 사람 보내 부러요.”

“여어엎 집이 자알해주니까 그으러잖아요.”

“내가 뭣을요? 술 마시지 말라고 한 말밖에 없는디.”

수화기 너머 공기가 조용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성길씨가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옴매 너만 성격 있는 줄 아요? 글고 이게 말을 더듬을 정도로 성질부릴 일이요?”

다시 걸어 전화를 왜 끊었냐고 묻고 싶었는데 참았다. 그래 내가 안 참으면 어떡할 건데...    

 

나는 산책로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옆 벚나무이파리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에라 돌부리를 걷어찼다. 그때 성길씨한테 전화가 왔다.

“일어나서 간다 하니 와 봐요.”

나는 냅다 뛰어 건너편 밭에서 집을 바라다보았다. 성길씨가 풀치에게 평상에 올려놓은 물을 먹이고 있었다. 나한테 잘해주지 말라더니 본인은 물씩이나 먹여주고 있었다.

“풀치 너 호강헌다야”

풀치는 다시 누웠다. 그가 누운 곳이 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내가 집으로 들어갈 때 풀치에게 보이면 계속 안 갈 것 같았다. 마당 옆으로 엉금엉금 기어 몰래 차로 들어갔다.

라디오를 켜고 풀치가 갈 때까지 기다렸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마을이 조용해졌다. ‘전기현 세상의 모든 음악’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앞집 상추가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내 감정이 출렁거렸다.

사람이 일생 동안 홀로 짊어져야 하는 쓸쓸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고요하게 저무는 서쪽 하늘로 검은 노을이 떠 있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끌고 다니는 자신의 그림자처럼 외로움은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없다. 풀치가 저러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성길씨 옷자락이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간 성길씨는 꼼짝하지 않았다. 컷 본능인가? 자기 영역에 풀치가 저러고 있으니까 (나랑 아무 사이는 아니지만) 괜히 짜증을 낸 것인가. 새삼 이 집 마당에서 셋의 간격을 확인하는 저녁이다.  

   

백미러에 풀치가 뒤척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풀치가 일어나 검정개를 끌고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뒤 모습이 캄캄한 구멍 속처럼 적막했다. 가슴이 시렸다. 산이를 데리고 산책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모습이 풀치의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앞산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내가 풀치에게 느끼는 것은 연민일까. 나는 마음의 밑바닥에 깔린 그 연민 때문에 스스로를 혼동해 상처를 받곤 했던 젊은 날도 있었다. 내 심연에 찍힌 발자국들을 지워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의 나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저 안쓰러운 것들을 염려해 줄 수 있을 만큼의 나이까지 왔다. 인생에 있어 최악의 질병이 연민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나에게 연민마저 없으면 나는 그저 썩은 나무토막일 뿐이다. 오늘 알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저 연민이라는 병을 달고 살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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