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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Oct 25. 2023

불량품들의 사계

가지가지 한다 25

가지가 한다



“누님! 꽃만 피면 뭘 할까. 전부 이파리가 쳐졌어.”

풀치가 봄날처럼 말짱한 입으로 초를 쳤다.

하루에 몇 번씩 들여다본 가지가 드디어 꽃을 피웠다. 나는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아 감격하고 있었다. 풀치가 마당 입구에 밀차를 세워놓고 밭으로 내려왔다.

 멀쩡했는디, 날마다 물주거든요.”

“맨날 들여다 본다고 자란다요. 때가 되면 커요.”

고추도 비실비실했다. 뭔 일인가 생각했다. 그래 햇빛 탓도 있지만, 이거는 필시 거름 부족이다. 혼자 단정 지었다(놀러 온 친구들이 성길씨 밭이 저렇게 잘되는 것은 분명히 거름을 줬을 거라고 내게 말한 것도 일조했다.) 가지 세 개 모종한 것 중 하나가 더 비실비실했다. 그 옆 토마토도 마찬가지였다.


나랑 차를 타고 같이 가고 싶어 하는 풀치를 떨쳐놓고 샘재 사거리 서부농협에서 거름을 사 왔다. 농협 직원이 가르쳐 주는 대로 토마토, 가지, 고추, 호박 옆에 3㎝ 거리를 두고, 땅을 파서 거름을 주고 흙으로 덮었다.

 “지발 튼튼허게 자라라.”

 “이미 이파리가 쳐졌는데 못 산다니까요.” 풀치는 옆에서 깐죽거렸다.

 “정성을 들이먼 살아날 것이요.”

 “뽑고 다시 심으세요.”

 “그쪽도 뽑았다가 심어 줄랑께 술병 주렁주렁 달고 다시 태어날라요?”

 “말을 왜 그렇게 해요?”

 “살아나면 어쩔 거요!”

 “나랑 내기할까요?”

 “안 헐라요. 내기 좋아하는 것들 잘 사는 것 못 봤으께.”

 나는 자신이 없었다. 풀치의 단호한 말에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예감했다.     


성길씨 밭의 토마토, 고추, 오이, 가지는 줄기가 어찌나 굵은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헬스클럽 가서 역기라도 드는 것일까. 그야말로 언제 자랐는지도 모르게 성길씨 밭의 작물들은 내 밭의 네 배는 넘게 위용을 자랑한다. 특히 토마토는 벌써 돌 넘은 아기 주먹만 하게 자랐다. 방울토마토 모종은 분명히 나보다 일주일이나 늦게 심었다. 그런데 벌써 저렇게 자라 내 기를 죽인다.


“와우 웬 빗방울” 갑자기 비가 왔다. 그럼 뿌리가 거름을 잘 빨아들이겠지.

약을 올리던 풀치는 허리를 숙여 밀차를 감싸 밀고 집으로 갔다. 비에 박스가 젖으면 흐물거릴까 봐 그런 것 같았다.

“아따 가지 잎새기가 풀치 보란 듯이 살아야 할 텐디”


이틀이 지났다. 성길씨는 내 속 터지는 줄도 모르고 토마토 자랑을 했다. 난 못 들은 척했다.

 나는 또 거름을 주기로 맘먹었다. 이번에는 십 센티 간격을 두고 거름을 뿌렸다. 하지만 거름을 준 다음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 밭의 작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줄기가 야위고 이파리는 꼬부라졌다. 제일 먼저 엄지손톱만 한 열매를 맺었던 토마토는 병든 삥아리 마냥 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가지가 우선 급했다. 우선 가지를 햇빛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심고 물을 흠뻑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돌보았는데도 생기가 돌지 않는다. 오늘은 사망 직전이다.

그래도 가지가 툭툭 털고 기사회생하지 않을까. 뽑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 내가 미련을 더 갖는 것은 땅꼬마처럼 제대로 크지는 않았지만, 보라색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가지는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풀치가 저 꼴을 보기 전에 뽑아버렸다. 풀치가 한 손에 소주병 들고 마당가 너럭바위에 앉았다.

“누님 가지가 안 보이네?”

“가셨다.”

“죽었네 뭐, 거 봐요.”

“얼른 가요, 그쪽도 뽑히기 전에.”

내가 얼마나 속상해한 줄 모르고 풀치는 입을 계속 뻐끔거렸다. 술도 과하면 빙 하듯 내가 욕심을 부렸다. 풀치는 너럭바위에서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뭐든 재촉 허지 말자. 늦으먼 늦게 필 것이고 늦게 열겄재.’     


텃밭은 아무 때나 기분 내키는 대로 거름 같은 것으로 힘준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꾸 텃밭에 내 기분을 쏟아 놓고 조급하게 졸라대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독인 줄도 모르고 흙을 달달 볶아 댔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성길 씨 밭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남은 가지 두 그루는 꽃도 없이 저렇게 서 있다. 그나마 호박 줄기가 막사 쪽으로 길을 트고 있다. 체면이 조금 서는 것 같다. 고추는 워낙 천성이 강인한 터라 그럭저럭 고추를 달기 시작했다. 토마토는 키만 뻘쭘하게 커 가분수가 되었다. 나중에 거름을 빨아들여서 그런지 하체는 새 다리요, 꼭대기는 그 옆 해바라기를 따라잡을 기세다. 내가 봐도 가관이다.

 

내년에는 나도 성길씨 밭처럼 검정비닐을 사다 덮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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