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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Oct 28. 2023

불량품들의 사계

삑사리 플루트 연주 26

삑사리 플루트 연주

                                  ㅡ생일



“삐빅 삐이익!”플루트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나무이파리 사이로 빠져나간다.

“옴매매 어쩌까”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마당 입구 호두나무 아래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뭇잎이 귀를 오므린다. 나뭇가지 위에 앉았던 새들이 날아갔다. 이 소리는 풀치 목소리도 까마귀 울음소리도 아니다.

친구 향이가 나를 위해 들려주는 존 덴버의 <애니 송>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집은 예술의 전당이다.  송파집에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힘들지만, 예당에 가면 그녀를 볼 수 있을 정도다.

향이는 무식한 나를 예술의 전당 음악회 리고 다니면서 클래식에 입문시켜 준 친구다.  


내 생일 무렵이면 떼로 뭉친 망초꽃이 환하고 버찌가 까맣게 익어간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내 생일이면 굴이나 두부를 넣은 미역국을(소고기는 어쩌다 한 번) 끓여 윗목에 상을 차려 촛불을 켜고 빌었다. 나는 이불속에서 고개만 내놓고 생일날마다 비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커서 케이크에 초를 켜놓고 해피송을 부르는 생일파티는 영 어색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케이크 대신 맛있는 음식 만들어 같이 어울려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생일 한 달 전부터 가까운 사람들에게 소문을 낸다. 내가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념일이라고는 달랑 생일 하나여서 이날만큼은 생일상을 걸게 차린다. 생일날 홍어, 잡채, 민어 건정, 미역국은 기본이다. 물론  지인들이 도와준다. 생일날 지인들과 술 마시고 노래하고 하루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여럿이 다 모일 수 있는 날을 맞추다 보면 정작 내 생일날은 혼자 보낼 때도 있었다.

수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잘살고 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다. 그래, 뭐 대단한 일 했다고 파티야! ‘철딱서니 참 없네’ 했다가도 생각해 보면 살아있으니 생일파티도 하는 것 아닌가.

    

얼마 전에 내 생일이었다. 나는 가위를 들고 집 근처 묵정밭으로 갔다. 거기 흐드러지게 핀 망초꽃을 꺾어 와 바케스에 가득 채웠다. 초대한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바람 빠진 자전거 옆에 일부러 망초꽃을 두었다. 꽃을 꽂아 두니 집이 좀 있어 보였다.      


향이는 언제나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다. 그녀는 30여 년 전에 상자 속에 봉인해 두었던 플루트를 꺼내 내 생일날 연주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애니송>을 매일 연습했다. 그러나 딸들이 친구에게 “엄마 실력으로 창피당하지 말고 그만둬라”라고 했단다. 결국 그녀는 내 생일날 연주를 포기했다.      

내 생일날 그녀의 플루트 연주를 기대한 지인들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플루트 연주가 취소돼 지인들의 실망이 상당했지만, 생일인데 그냥 앉아있을쏘냐. “풍악 한판 울리자”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모았다. 그늘막 아래서 가수인 써니가 기타를 치고 우리는 노래를 했다. 동네 사람들도 이런 풍경은 처음인지 길가에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인집 성길씨는 우리가 사다 놓은 술병을 보고 집으로 들어간 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술 다 받아먹 다가는 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어느새 산 뒤로 해는 넘어갔다. 나뭇잎과 쑥을 뜯어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웠다.

우리는 후반전을 펼쳤다. 빈 술병은 쌓이다가 쓰러지고 다시 쌓였다. 별들은 반짝거렸다. 취기가 오른 노래와 기타 소리는 어둠 속으로 퍼져갔다. 주민들 항의가 오기 전 집으로 자진 철수했다. 한편으로 길 건너 술고래 풀치가 언제 마당으로 들어닥칠지 몰라 집으로 들어온 것도 있었다.  

  

집으로 갈 사람은 가고 술꾼들만 남아 연장전을 펼쳤다. 써니는 기타를 던져놓고 텃밭에서 레드치커리를 따와 겉절이를 무쳤다. 나는 홍어 잡채 연어 샐러드를 새로 깔았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매너 죽여주는 준호 친구가 나 심심하다고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 줬다.

술이 오르자 현란한 스텝을 밟던 점심이 동생 간이 슬슬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나 쫓아내려면 쫓아내라고 해”

“그래 남자들은 날 새고 들어오면서 왜 우리는 안 되는 거야,”

외출하면 남편의 전화를 수십 통 받은 팔방미인 성혜가 말했다.

“언니 생일인데 노래 한 곡 날리지?”

말이 없다가 한 방에 주위를 날려버린 대전에서 온 순원이가 가만히 말했다.

나는 술이 들어가야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아직 발바닥까지만 취했다. 아! 알코올이 부족했다. 나는 어딘가에 있을 술을 찾기 위해 창고, 주방, 냉장고를 이 잡듯 뒤졌다. 마지막 희망인 싱크대 옆 테이블 아래를 풀어헤쳤다. 이사 올 때 풀지 않고 그대로 둔 박스 안에 데킬라가 있었다. 나는 외쳤다. “ 데킬라 마시고 제낄라” 우리는 환호했다. 그녀들의 술 마시는 속도를 보면 또 술이 부족할 것 같았다. 이것을 안 나는 구호품 전달하듯 술을 순서대로 따랐다. 이곳은 산밑이라 가게가 없다. 그래서 술을 아껴 마셔야 했다. 나는 술이 눈 밑까지 차오르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있는 폼 다잡고 불렀다. 코가 따끔했다.

두세 달에 한 번이나 통화할까 말까 하는데 어떻게 알고 이런 행사에는 꼭 참석하는 은정, 술 한 모금도 못 하면서 듣도 보도 못한 노래를 부르는 애경, 술에 취하면 팝송만 부르는 연주가 내 어깨를 만지며 사브작 사브작 스텝을 밟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우리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밤새 고래 잡으려 허우적거렸다. 그녀들은 무엇에 억눌렸는지 모르지만, 정말 오늘 밤을 찢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녀들에게서 오늘 밤만 살리라라는 눈빛을 읽었다. 그 에너지를 일으키는 일등공신은 당연히 술이었다. 술은 좇기 듯 살아오면서 답답해하던 그녀들을 해체시켜 버렸다. 점심이 와 미선이는 한잔씩 더 따라 마셨다.  술이 바닥을 드러내자 둘이 술병을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치다가 마지막 한 방울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 사이 몇몇은 조용히 사라졌다. 우리는 정말 데킬라 마시고 밤을 제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른 새벽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녀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자잘한 구멍이 나 있었다.  술 방울이 묻어있는 구멍을 쓸어 내다가 나는 가슴 밑바닥이 허전함을 느꼈다.   

  

향이는 생일날 못한 공연을 오늘 나만을 위해 연주하겠다고 했다.

한문샘이었던 그녀는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책을 자주 사다 준다. 특히 동물에 관련된 책이다. 최근에 받은 책 중에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였다.

그녀는 글을 쓸 때 단어와 쉼표 하나라도 잘 못 쓰면 바로 잡아주는 모른 것 없는 친구다. 오지랖도 나 못지 않다. 나는 그녀에게 집밥 먹고싶다고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다.

향이는 악보를 호두나무 아래에 있는 자전거 손잡이에 걸쳐놓고 플루트 연주를 시작했다. 삑삑거리던 소리가 십 분쯤 지났을까. 그녀의 호흡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플루트 소리는 잔잔하면서도 날렵하게 망초꽃과 어우러졌다. 마당에 <애니 송>이 바람 타고 흐른다.     

 

귀가 짧은 고양이 귀가 쫑긋 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이파리가 나풀거린다. 친구가 이곳까지 와서 나만을 위해 플루트를 불고 있다. 제자리에 머문 구름, 코끝을 문지르며 지나가는 바람, 살랑거리는 망초 꽃, 미묘한 플롯 소리는 내가 왜 여기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친구는 다음 그다음 생일에도 더 갈고닦은 플루트 실력으로 마당을 가득 채워준다고 했다. 날아가는 새들도 전깃줄에 앉힐 것 같은 기세다. 그녀는 정식으로 레슨을 받으러 다니겠다고 했다. 생일날 잘라온 마당에 망초꽃은 아직도 싱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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