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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Nov 01. 2023

불량품들의 사계

호두 떨어지는 소리 빗속을 뚫고 27

호두 떨어지는 소리 빗속을 뚫고


  

                              

바람이 빗속을 지나간다. 평상에서 ‘‘텅’ 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산이가 놀라 킹킹거린다. “쉿!” 산이를 껴안고 숨을 죽이고 귀를 세웠다. 다시 지붕에서 ‘퍽’ 소리가 났다. 사람 발소리도 짐승 발소리도 아니었다. 도대체 저 소리의 정체는 뭐라는 말인가. 빗속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가슴을 조였다. 이제는 ‘퍽’ ‘텅’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새벽까지 뜬눈으로 날을 샜다. 아직 어둑했다. 소리가 궁금해 도저히 방에 있을 수 없었다. 마당에 나가서 소리의 정체를 알았다. 덜 여문 호두가 평상에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본 호두 꽃은 향기가 없다. 연두색 꽃은 발이 수십 개 달린 벌레 같이 생겼다. 호두나무는 4월 중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밤꽃 하고 비슷하다. 호두꽃하고 밤꽃은 약간 차이가 있다. 엷은 아이보리색 밤꽃은 6월 초에 핀다. 향도 진하다.   

호두꽃은 5월 초부터 호두 모양이 되어간다. 꼭 우리 강아지 산이 고추만 한 게 가지 끝에서 달랑달랑 두 개씩 한 세트로 달려있다. 호두는 초가을에 수확한다. 파란 껍데기를 벗겨내면 그 안에 호두가 있다. 파란 껍데기가 얼마나 딱딱한지 돌이나 망치로 두들겨 벗겨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호두가 나온다. 호두가 하나만 매달려 있는 것은 비바람에 한 개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초여름 날 한밤중에 빗속에서 호두 떨어지는 소리에 정말 깜짝 놀랐다. 깜깜한 밤 산 밑에서 난데없이 여자 혼자 있는데 평상과 지붕에서 들리는 돌덩이 떨어지는 소리라니. 산 이는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릎으로 뛰어올라 어깨로 파고들었다.


비는 며칠째 내리고 있다. 이파리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퍽’ ‘턱’ ‘텅’ 호두 떨어지는 소리가, 비 사이사이에 화음을 넣는다. 비 올 때 평상으로 떨어지는 호두 소리는 청명하다. 맑은 날 떨어지는 소리는 둔탁하게 들린다.     

지붕이 천막이라 비 오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거기다가 우리 집 벽하고 붙다시피 서 있는 호두나무 가지가 지붕에 닿아 있다. 이파리에 퍼 붓은 빗방울, 지붕으로 떨어진 빗소리와 함께 호두 떨어지는 소리가 귓등을 때릴수록 사람들 발소리는 작아진다. 고양이들까지 지붕 천막 속에서 비를 피하느라 울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작은 합주가 시작된다.     

질경이, 상추, 옥수수, 해바라기, 봉숭아, 맨드라미, 토마토, 나팔꽃, 베고니아, 달맞이, 패랭이, 채송화, 호박잎, 아로니아, 호두나무, 온갖 이파리들 비 맞는 소리, 한술 더 떠 집 바로 옆 비닐하우스 연탄창고를 내리치는 빗방울 소리, 프라이팬에 소시지 볶는 소리가 뒤섞여 집 안팎의 빈 곳이 가득 차오른다.  


저 소리는 까마득히 잊힌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어렸을 때 소풍 가는 날이면 꼭 비가 왔다. 체육 선생님께서 구령대에서 소풍 가는 날을 전교생을 모아놓고 발표하면 우리는 먼저 비 걱정부터 했다. 우리가 걱정한 것은 소풍 간다는 말을 듣고 비가 오면 어떡하나. 그때는 구름이 정말 얄미웠다. 또래들끼리 모여 비 안 오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던가. 비가 와 소풍이 취소될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그렇게 빌고 잠 못 들고 뒤척거리다가 새벽에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면 환장한다. 후다닥 일어나 방문을 열었는데 비 대신 부엌에서 엄마가 어슷하게 썬 분홍색 소시지를 프라이팬에 볶고 있었다. 그 소리가 양철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호두 떨어지는 소리도 자주 들으니 이제는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야외무대가 생각났다.

까마귀가 지휘를, 물까치와 참새들이 작은북과 트라이앵글을, 채송화가 하모니카를, 패랭이가 바이올린을, 옥수수가 콘트라베이스, 해바라기가 첼로를, 나팔꽃이 트럼펫을, 맨드라미가 비올라를 켜는 천연 야외 공연장에서 앞산 나무들과 나는 관객이다.

비 오는 날 떠도는 개들과 길고양이들이 처마 아래서 연주를 같이 듣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길 위를 떠도는 모든 것들을 이 자리로 초대하고 싶다.   

  

호두 떨어지는 소리가  빗속을 뚫고 있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술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술안주를 만드는 시간은 소풍 가기 전날만큼이나 설레는 느낌을 준다.  

아무튼 빗소리와 ‘퍽’ ‘텅’ 소리는 기어이 빨간 소주 뚜껑을 따게 만들었다. 술잔에서 그리운 것들이 퐁퐁 떠오른다. 비 오는 날 음악은 최고의 안주다. ‘까르멜로 자뿔라’ 가수 ‘빗 속에서’와 ‘가난한 사랑’ 노래를 배경으로 깔아 놓는다. 맞은편 빈자리 술잔에 술을 따른다. “캬아 ” 앞자리 술을 비우고 잔을 엎었다.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술잔을 비울 수록 덜 여문 호두 떨어지는 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지금 머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으로 훔치며 문안으로 들어서는 길손들이 있다면, 그와 함께 빗방울을 세고 싶다. 그리고 구운 줄줄이 소시지랑 술 한잔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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