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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Dec 09. 2023

불량품들의 사계

귀뚜리와의 동거 40

귀뚜리와의 동거   

                                           

“어머 귀뚜라미네. 밖에 내보내 줘야 되는 거 아니야?”

대전서 놀러 온 순원이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냅둬. 동거할라고.”    

 

일주일 전부터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방에 돌아다닌다. 밤 12시 넘으면 녀석이 나타난다. 먹을 걸 찾는지 출입구를 찾는지 두리번거리다가 폴딱폴딱 뛰어다닌다. 어느새 목욕탕으로 갔다가  거울뒤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울어댄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 나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엎드려 있다가 펄쩍 뛰어오른다. 오히려 반기는 것 같기도 하고 방안 생활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방안에 들어온 벌레를 거의 쫓아낸 적이 없다. 순원이는 내보내라고 재촉했다. 그녀는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한다.

이틀이 지났다. 저러다가 굶어 죽는 거 아닌가 싶어 내보내기로 했다. 손이 닿을라치면 폴딱 뛰어 쓰레기통 뒤로 가서 앉는다. 기어가서 손으로 덮치면 재빨리 몸을 날려 식탁 밑으로, 책상 옆으로, 의자 다리 뒤로 손이 닿기 애매한 곳에 앉는다.

“야! 귀뚜리! 나하고 해보자는 거여 뭐여. 울지를 말던가. 안 뵈는 곳으로 가던가.”     

귀뚜리는 술래잡기를 십 분 넘게 하다가 식탁 밑에 엎드려 있는 나에게 딱 걸렸다. 혹시 잡다가 다리라도 부러뜨릴까 봐 나는 엉덩이를 위로 쳐들고 목을 옆으로 틀어 바들거리는 손가락으로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나며 머리통을 식탁 모서리에 박았다. 얼마나 아픈지 녀석을 확 던져 버릴 뻔했다. 주방 창문을 열고 수국 위에 가만히 귀뚜리를 내려놓았다.

 “여기는 니 짝 없고, 니 먹을 것도 없어야. 이슬(진로소주)밖에.”


이파리 한 장 나부끼지 않는 날, 산밑에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 전화가 온다. 헛생각하다가 상대편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들어 오해가 쌓여 섭섭한 일이 생겼다. 그렇지만 곤충과 나무들 두런거리는 소리는  잘 듣는다. 내 귀가 언제부터 곤충과 나무와 가까워졌을까. 내 몸 안의 번역기를 돌리고 있는 이는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나는 캄캄하고 조용한 적막 속에 소리 없이 다가오는 무언가의 느낌을 그들의 소리라고 믿는다. 밤이 깊을수록 마음에도 더듬이가 자라나 보다.

  

저녁 뉴스를 보려고 티브이를 켰다. 이제 장마가 끝났다고 한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높은 늘을 끌고 오고 있다.

'골목 입구에 가을이 첫발을 딛고 서 있다. 내 몸도 마음도...'   

다시 방 안에서 귀뚜라미가 노골적으로 울어댄다. 암컷을 유혹하나, 그놈이 돌아왔나, 창문 틈을 확인해 본다. 불을 끄면 울어대다 내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면 딱 그친다. 귀뚜리는 밤새 날개를 비볐다. 내가 너를 위해 울어 줄 수도 없고, 나도 참고 있다.

“그래 니가 자리를 얼마나 차지헌다고 같이 살자. 그 대신 울지 말어야!”

귀뚜리 울음은 집안을 한 바퀴 돌고 내려와 적셨다.    

  

호두나무 이파리가 떨어지는 밤, 나도 넋을 놓고 노래하고 싶다. 그래 나 대신 많이 울어라. 음악을 켜고 소주 뚜껑을 땄다. 우르릉 쾅쾅  보일러 돌아가는 온도를 줄였다. 식탁 밑에서 날개 비비는  소리가 들린다.  몰래 우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귀뚜리가 별들의 기척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대신해 울고 있

그래 목숨 다하는 날까지 나랑 살아도 좋다. "니 친구들도 데꼬 와라"  먹을 것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자. 나는 진로 소주로 너는 밤이슬로 옆구리를 달래 보자. 구월이다. 사랑에 굶는 이들이 없기를...!  

 허공을 붙잡고 별들이 깜박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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