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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Jan 27. 2024

불량품들의 사계

눈사람, 그는 혼자 오래 살았다 58

눈사람,  그는 혼자 오래 살았다


         

1

눈이 마을을 덮쳤다. 난방 텐트 안에서 기어 나왔다. 차 지붕에 십오 센티 정도 눈이 쌓였다. 연속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남양주 평내동 살 때 강아지 산이랑 솔이랑 눈밭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이후 정강이까지 눈이 쌓인 것은 처음이었다.

119를 쳐야 하나, 헬기를 띄어야 하나,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눈 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성길씨가 자기 마당에서부터 내 마당 앞까지 깔끔히 쓸어오는 중이었다. 성길씨는 참 부지런하다. 오늘 같은 날은 부지런도 병이다. 내가 저 순수한 눈 위를 개처럼 뛰어다니면서 야생성을 살리고 싶다는데, 좀 쌓이게 두면 안 되나. 하여튼 뭐가 딱딱 맞는 게 없어요. 지가 골프공도 아니고.

     

언제부턴가 빗자루를 들고 길에서 눈 쓰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구청에서 염화칼슘을 뿌려 눈을 녹여버린다. 참 쉬운 세상이다. 염화칼슘은 다른 것 다 제쳐두고 반려견이 밟거나 핥으면 병원에 가야만 한다. 눈을 쓸고 있는 성길씨가 미웠지만, 얼마 만에 눈 쓰는 것을 보는 것인가.


어렸을 때 마을 사람들은 새벽부터 너도나도 전부 나와 눈을 쓸었다. 눈을 치워 길을 터주었다. 아이들은 참새처럼 조잘거리며 그 길을 따라 학교에 갔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던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눈을 쓸고 있을까. 아니면 출퇴근 길을 걱정하고 있을까.

그때 어른들이 눈을 새벽부터 쓸던 이유가 있었다. 미끄러져 다칠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눈을 쓸지 않으면 땅이 얼었다가 녹기를 몇 날 며칠 반복했다. 그래서 땅이 질척거려 신발이 엉망진창이었다. 장화는 비 올 때만 신는 게 아니었다. 우스운 소리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했다.

아부지는 빗자루로 우리 집 마당에 이어 동네 골목까지 쓸었다. 성길씨에게서 아부지 모습이 보였다.

    

언덕에서 따다 덖어 만든 국화차를 마시다가 내려놓았다. 부지런히 눈을 치우는 성길씨에 우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저씨, 눈 좀 놔두먼 안될까요?.”

“왜요?”

“눈을 보고만 있기가 그래서요. 눈사람 맨들라고요.”

“다 큰 사람이 자꾸 눈사람을 만든다고 할까. 넘어지면 큰일 나요.”

“하여튼 멋이라고는 없어!”

중얼거리며 얼른 밖으로 나갔다. 성길씨 빗자루를 피해서 눈굴리는데 눈이 뭉쳐지지도 않고 아예 굴려지지도 않았다.

“눈이 어째 안 굴려진다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무뚝뚝 허기는.’

나는 주먹만 하게 눈을 뭉쳐 물을 묻혔다. 성길씨를 뒤따라가면서 쓸어놓은 눈 위에 눈을 굴렸다. 순식간에 눈이 불어났다. 김장독 항아리만 하게 몸통을 만들었다. 몸통 위에 바가지만 하게 머리를 만들어 올려놓았다. 나뭇가지를 꺾어 눈과 입을 만들어 일단 숨을 쉬게 해놓았다. 성길씨는 ‘나이 생각해야지, 못 말려’ 혼자 말을 했다.

아저씨나, 나나 애가 없잖아요. 글고 인구절벽 이라는데."

그는 빗질을 멈추고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여'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피하였다. 그는 빗자루를  던지다시피 연탄창고 앞에 세워 놓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에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더 했다.

" 이 나이에 애를 낳겄어요, 어쩌겄어요. 눈사람이나 만들어야재?"

나도 손발이 시려 집으로 들어왔다.  

보라색 방한화를 신었는데도 양말이 축축했다. 낮인데 석유난로를 켜고 양말을 벗어 주전자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 생각이 났다. 눈밭에서 대나무 스키를 타고 놀다 오면 엄마는 내 등짝을 몇 대 때리고 젖은 양말을 벗겼다. 시커멓게 탄 장판 아랫목에 앉히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이불속 양말에서 김이 솔솔 올라왔다. 장판의 힘이었다. 바람벽에 기대어 자다가 밥 먹으라고 엄마가 깨우면 어느새 깜깜한 밤이었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80 후반, 주인집 할머니랑 같은 나이다. 아저씨가 할머니 때문에 마당을 쓸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 뒷방에 세든 할매도 있다. 이래저래 눈을 치워야 맞는 것 같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아저씨가 난감해질 수밖에 없으니. 집 마당 쓸어 준 것을 백 프로라 치고 아저씨, 할머니, 뒷집 할머니, 각각 이십오 프로씩. 그중 나를 위해 이십오 프로를 생각하니 고마웠다.

혹시 내 마음이 성길씨에 전달됐다면 마당에 눈사람이 웃고 있을 거야.

‘성길 씨, 날 풀리면 막걸리 한 잔 헙시다.’

2

놀러 온 고양이 까불이를 맞은편에 앉히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를 듣다가 목도리를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펑펑 퍼붓고 있었다. 보드카가 생각나는 밤이다.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그레이구스 보드카에 토닉워터를 따르고, 레몬 한 조각을 넣어 보드카를 섞으면 내가 좋아하는 술이 된다. 실은 손가락으로 눌러 짠 레몬이 더 쌉싸름 달콤하다. 손맛이야말로 술꾼의 화려한 밤에 기여하는 마술이다. 눈이 내리니 조제해 마시던 보드카가 생각난다. 오랫동안 운영하던 가게도 접었다. 이젠 발 뻗고 잘 수 있다. 오늘은 안주도 필요 없다. 오직 저 눈발이면 그만이다.

    

새하얀 눈 위에서 방한화를 신고 중심을 잡은 왼발은 오른발을 따라 돌았다. 두 발은 한발 한발 돌면서 정성껏 눈꽃을 만들었다. 명암도 없이 오직 흰색으로만 돋아나는 백설의 돋을새김이 아름다웠다.

언제부터 서 있었을까. 성길씨가 마당 입구 단풍나무 아래 서서 연자방아에 서 있는 눈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모아 동그랗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그의 담배 연기가 흐느적거리면서 허공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했는지 담배 연기를 목 안 깊숙이 빨아들였다.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한 밤, 무엇이 두 그림자를 서성거리게 하고 있을까. 나는 한 사람과 몇 번을 울고 헤어져야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푹푹 쌓일 수 있을까. 그는 수돗가 옆에서 한참을 서 있고, 나는 처마 밑에 서서 웅크리고 있는 앞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서성거림을 알 것도 같았다. 적적한 마음은 그나 나나 똑같았을 수밖에.  

   

겨울밤 깜깜한 깊은 곳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술 한잔이 딱인데. 밤이라 한잔 마시자는 말을 먼저 하기도 그렇다. 오해를 사기 십상이니 그도 여의치 않다. 분위기는 딱 술인데 그렇다고 내일 낮에 한잔할까요? 할 수도 없고 밤이 무슨 휴전선도 아니고 나원... 밤 그 자체가 문제가 되다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얼굴 한 뼘 자유롭지 못한 나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그가 먼저 나에게 ‘술 한잔할까요?’ 물어보면 내가 잡아먹나. 그는 담배꽁초를 구겨 손에 들고 있었다. 그도 눈 위에 꽁초를 던져 얼룩을 만들고 싶지 않았나 보다. 우리는 내리는 눈만 바라보길 한참,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싱겁게 종료됐다.

내 집도 아니면서 그가 담배꽁초를 마당에 버리면 나는 꽁초를 주우면서 성길 씨에게 그동안 잔소리를 좀 했다. 오늘부터는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마을버스가 끊겼다. 함박눈은 그치질 모르고, 천정에서 길고양이들 울음과 발소리가 커져 온다. 이도 저도 아닌 밤이 쌓여간다. 입안에 노래가 쌓인다.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너와 나의 옛일처럼 방바닥에 술병이 꼿꼿이 서있다. 처마 밑에서 바람이 서성거린다. 이 눈 속을 같이 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한 번도 적 없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눈을 뒤집어쓰고 눈도 코도 없이, 자작나무를 등불 삼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차갑고 가혹한 영하의 밤이다.

놀기 좋은 날이 있듯 오늘은 울기 좋은 밤이다. 혼자 노래를 불러도 지금 이 처지가 눈 속에 파묻혀 바위틈에 웅크리고 있는 짐승과 뭐가 다를까.

지난 시간은 나에게 무수한 상처를 입혔다. 그 슬픔은 살갗을 파고들어 스스로 옹이가 되었다. 한때는 허공에 가 닿을 거라 꿈을 꾸었던 가지들. 풍파에 꺾인 나무는 뜨거운 여름날 그늘을 만들 수 없다. 비탈진 언덕에 눈보라에도 흔들림 없이 귀룽나무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다.   

   

‘그래 무엇이라도 만나자’ 패딩 잠바를 걸쳤다. 밖으로 나갔다. 눈사람 어깨에 와인 잔을 올려놓았다. 서로 말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녹아 버릴까봐, 누구도 한번 뜨겁게 안지 못했다. 그래도 구르고 굴러 눈사람이 된다. 사랑에 져도 사랑을 하듯. 눈 위에서 쓰러진 눈사람, 눈 위에서 일어선다. 다칠 줄 알면서 걸어가는 눈사람.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나는  눈사람을 닮아간다.

눈사람도 나도 혼자 오래 살았다.  그는 나를  껴안았다. 우리는 천천히  식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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