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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Feb 08.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유숙이는 64


사람도 품고 비밀도 품고 1


그동안 되는 일이 없이 괴로워 버릇처럼 광주로 내려갔었다. 가지고 가는 짐이라고는 조간신문과 생수 한 병뿐이었다. 나는 광주 내려갈 때마다 친구 유숙이 집에서 짐을 푼다.

     

햇빛이 등을 파고드는 어느 해 가을이었다. 옷 위로 내리꽂는 빛이 등을 따끔거리게 했다. 이렇게 빛이 좋은 날 거리에서 빈둥거리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땅이며 건물 외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빛들이 발뒤꿈치를 꿈틀거리게 했다. 눈에 들어오는 거리의 구석구석까지 비추는 정오의 빛이 아깝기만 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햇빛을 까닭 없이 소진해 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소설 속의 뫼씨는 햇빛 때문에 살인을 했는데... 이도 저도 아닌 나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에 결박당한 짐승처럼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날 좋다’는 말을 할 때는 햇살이나 바람이 허공 밑을 깔고 돌며 세상을 온통 선명하게 만들고 들썩거리게 할 때다. 나는 이런 날을 눈비 오는 날만큼이나 좋아한다. 이럴 때는 어디든 가고 싶다.

오늘이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날이다.


유숙이에게 전화를 했다.

“광천동 터미널 두시 도착이야.”

“나 오늘 약속 있으니 오지 말고 다른 친구네 집에 가서 있어. 그럼 내가 그리 갈게.”

“뭐야?”

이상한 일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일을 미루고 나랑 시간을 보내는 유숙인데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려갈 때마다

“알았어. 박 대장(남편)하고 나갈게.”

항상 열 일 제쳐두고 친구 부부가 나를 데리러 왔다. 집에 가면 식탁 위에 조기, 굴 무침, 갈비, 진수와 성찬이가 식탁 위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일까.  

   

생각해 보니 그녀가 언제부턴가 이상해졌다. 어찌 된 일인지 광주 내려갈 때마다 일이 있다며 자기 집에 오지 못하게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줄리아 로버츠 닮은 제니영 친구네 집에서 지냈다. 얼마 전 이 친구도 용인에 커피숍을 열어서 광주에 없다.

 

유숙이는 자기가 바쁘면 박 대장이라도 보내던지 집에 먼저 가 있으라든지 해야 하는데... 나는 점점 의문이 들었다. 내가 갈 곳이 없어서 굳이 그녀의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 집처럼 편하고, 숨 막히게 하는 아파트가 아니고, 그녀의 반찬이 기막히게 맛있고, 밤늦게 들랑날랑하기가 편안했다. 분명 나를 집에 못 오게 하고 밖에서만 보자는 그녀에게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생겼음이 분명하다.

“오늘은 내가 택시 타고 니네 집으로 갈 텐께 일 보고 와라.”

“옴매 이게 뭔 소리데?”

“니가 바쁜 거 같아서 나 혼자 갈라고.”

“아이고!, 안 돼야!”

“니가 뭐라고 허든지 나는 간다. 나를 느그 집 못 오게 할 니가 아닌디 이상허잖아?”

“너 오면 큰일 나야!”

“그러니까 말을 해봐, 내가 느그 집 가먼 큰일 나는 일을.”

“아따! 정말 어쩌까 잉.”

“아따! 내가 더 미치겄다.”

“실은 ...”

“실은 뭐!”

“실은... 내가... 박대장한테... 너... 결혼했다고 했어야.”

“뭐라고? 이건 또 뭔 소리여?”

“내가 박대장한테 너 결혼해서 냉장고 사준다고 이 백만 원 타서 썼어야.”

“그럼... 그것 때문에 지금껏... 에라잇! 이 부실아! 그럼 얼마 전에 이혼했다고 해!”

“안 돼야! 집들이, 백일잔치, 애 돌잔치 갈 때마다 오십만 원, 백만 원씩 타 썼고 너 잘살고 있다고 했어야.”

“ 곧 내 아들 환갑잔치헌다고 허겄네.”

나는 졸지에 결혼해서 애를 낳은 유부녀가 되어 있었다.     

유숙이는 나한테 말도 못 하고 속앓이를 엄청 했다고 한다. 나는 유숙이가 나를 결혼시킨 이유를 금방 눈치챘다.  

   

유숙이는 남편 몰래 아껴(?) 모은 꽤 큰돈을 지인에게 빌려줬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잠적해 버렸다. 그때 유숙이는 사색이 돼 광주서 송파까지 나를 찾아왔었다. 처음부터 그 사람은 유숙이가 돈이 있는 줄 알고서 접근했다. 돈 액수는 차마 말 못 하겠다. 유숙이 남편 박대장은 아직도 모른다.   

   

유숙이는 친구들과 밥 먹고 나서 미적거리는 법이 없다. 무조건 먼저 달려가 계산한다. 친구들이 광주에 내려오면 방 잡아주고, 좋은 곳에 가서 잘 먹이고, 차 트렁크 가득 과일 박스를 채워준다. 한 번은 내게 뭐라도 사주고 싶은데 살 데가 없자 길가 만물트럭에서 주전자를 사준 적도 있다. 나는 그 주전자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렇게 베풀기 좋아하는 유숙이가 그 일로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동안 돈 쓰던 가락은 있지 돈 나올 구멍은 없지... 그래서 그녀는 나를 결혼시켜 버린 것이다. 남편이 나에 대해 뭐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유숙이 말로는 내 말이면 박대장은 다 믿어준다고 했다. 유숙이 둘째 언니랑 우리 사촌 오빠랑 결혼해 우리가 사돈지간이라 더 그럴 수도 있다. 유숙이는 절도 지어 보시했다. 그 절에 내 방도 한 칸 마련해 주었다. 유숙이는 장기도 기증했다.   

    

유숙이는 내가 미얀마를 함께 가자고 했을 때도 이유도 묻지 않고 두말없이 따라나섰던 친구다. 그래서 호되게 고생했다. 미얀마 껄로 여행 중 오지를 달리던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 일행은 “이러다 길에서 날 새는 거 아니야?” 걱정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유숙이는 나에게 박카스를 사 오라고 했다.

“세상에! 여기서 박카스를? 아, 하루살이 염통 찾는 것보다...... ”

나는 지진이 났지만, 그녀의 간절한 눈빛과 괜히 데리고 와서 고생시킨다는 미안함에 나의 전투력은 살아났다. 차를 고치는 동안 혼자 걷다 보니 저 먼 길가에 휘파람만 불어도 주저앉을 것 같은 우리 60년대 점방 같은 곳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유숙이도 터덜터덜 뒤따라왔다. 삐걱거리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십대로 보이는 까무잡잡하고 곱슬머리에 눈이 큰 청년이 있었다. 나는 손짓 발짓을 하다가 바닥에 박카스 병을 그렸다. 총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박카스 비슷한 것을 가져왔다. 우리는 대한민국 만세라도 부를 판이었다. 아니 불렀다. 그녀는 박카스 한 병을 마시더니 금세 소금에 절인 배추 같던 얼굴이 싱싱하게 펴졌다. 유숙이는 나만 믿고 따라왔는데, 여행 와서 보니 매사에 어리버리한 나를 미덥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간 경주 친구가 다 알아서 해줬다. 그러다가 유숙이는 박카스를 찾아낸 나를 보고 “아따따! 너는 몸으로 말 다헌다 잉” 그녀는 ‘박카스’를 찐 사랑 한다. 유숙이는 그날 밤 박카스의 힘으로 마을 주민들과 북을 치고 춤을 추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생각하면, 박대장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나중에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둘이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에 얼마마 실망할까. 유숙에게 솔직히 남편에게 말을 하자고 했다. 유숙이는 이미 알릴 단계는 종 쳤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고향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나, 명희, 유숙, 영아, 인순, 진녀가 모여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었다. 큰언니 아들 사진가 시우의 스튜디오였다. 연예인들도 많이 오는 곳이다.

유숙이 동생이 와서 저녁을 샀다. 우리는 인천, 광주, 목포로 각자 돌아갔다.     


다음날 유숙이는 남편한테 내 아들이 훌륭하게 자라 멋진 사진작가가 되었다고 했다고 전화에 대고 멋쩍게 웃었다.


그녀에게 나는 아직도 결혼이 진행 중이어야 하는 사람이다.

“유숙아! 박 대장은 눈이 없냐? 귀가 없냐? 속아준 척하는 것이여.”

“아따, 안 돼야.”

그럼 내가 니 남편을 어찌 보냐.”

“ 절대 안 된다. 비밀이다.”

“그런디...니가 나를 결혼시켜 남편 돈 뜯어냈다고 글로 써도 되겄냐?”

“.....”

“글은 솔직하고 정직해야 혀 !”

유숙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어쩌겄냐... 니가 잘 된다면야... 써야재...”

“본명으로 써도 되겄냐?”

“어쩌까, 니 알아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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