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끝이 아닌 시작
마음이 기울고, 몸이 기운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뛰어볼 수나 있나 궁금해서 시도를 해봤다. 기껏해야 5초 정도?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새 몸에 무리가 온 모양이다.
왼쪽 발등이 저릿하고 아팠다. 깜짝 놀라 멈출 만큼 생소한 통증이었다. 말 그대로 달리는 게 아니라 두 발이 땅과 박치기를 하는 듯했다.
쾅쾅!
굽어지지 않은 무릎, 심각해진 근손실이 한 몫했다고 본다. 다시 시늉을 해보니 뒤꿈치가 온 충격을 다 흡수하고 있었다. 허리 디스크와 목 디스크를 조심하고 있는데 분명 안 좋은 영향을 줬을 게 뻔했다.
가벼운 조깅 자세를 할 때 이렇게까지 불편감이 드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감히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착지를 잘 못 한 것 같은 느낌이려나? 뚝딱거림도 심해서 도저히 사람 몸짓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디스크에 달리기 운동이 좋다고 해서 나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자 짧게 시도해 본 것인데 괜히 통증만 더 생겼다. 직후에는 발등만 아팠는데 다리 옆까지 불편한 느낌이 들자 공포심이 생겼다. 또 시간이 지나니 평소보다 허리가 뻐근한 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 수도 있고 괜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불안감이 높아진 상태에서 이런저런 통증이 생기니 훨씬 예민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한 번은 달려보고 싶어 했을 테지만 괜한 객기로 지금껏 조심하던 것에 흠이 갔을까 봐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못 달린다는 거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는데. 괜히 시도해 본 거니까.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텐데, 날씨가 너무 좋았고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무릎에 대한 글을 쓰고 있자니 자꾸만 보이지 않는 벽에 도전하고, 부딪혀보고 싶은 모험심도 생겼다.
그래서였다. 한 번 달려본 이유가.
누군가 나를 지켜주고 있는 듯한 느낌에 나도 한 걸음 용기내고 싶었다. 지금껏 잘 버텨온 나에 대한 보상심리가 이상한 곳에서 작동한 것이다.
'나도, 이 쓸모없는 껍데기 같은 몸에 더 이상 갇혀 있고 싶지 않았어.'
물론 스스로 느끼기에 그렇게까지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 통증이 있긴 하지만 지속적일 것 같지 않을뿐더러 경미하다. 하지만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모든 게 두렵게만 느껴진다. 과연 이렇게까지 사소한 일로 죄책감이 드는 게 건강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오늘 두 가지를 인정하고 삼켜내야 했다.
1. 나는 달릴 수 없다. 시도조차 위험하다.
2. 고통은 무릎에서 그치지 않는다.
또 한 번 좌절을 겪은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가 네 무릎이 되어줄게."
그 말은 꾹꾹 참아왔던 눈물을 터지게 만들었다. 나의 뭐뭐로 평생을 살았던 엄마는 기어코 죽을 때까지 나의 뭐뭐일 생각인가 보다.
선천적인 아픔보다 후천적인 아픔이 심리적으로 더 힘들다는 말에 공감한다. 어려서부터 무릎이 약했지만 안 되는 자세는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무릎을 굽혀 앉는 건 물론이고, 뛰는 걸 시도해 볼 수도, 무릎을 꿇거나 아빠 다리를 할 수도 없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겪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유튜브나 티브이로 사람들을 볼 때 자유로워 보이는 몸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저 사람은 저렇게 해도 아프지 않은가 봐.'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젊음은 저런 건데.'
마음 편히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우스워질 때면 부정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얼마 전에 어린 사촌동생이 발목을 삐끗해 병원에 간 적이 있다.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내가 보호자로 있었는데, 양말을 벗는 것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대서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언니 끝났어."
해맑은 표정으로 동생이 걸어 나왔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뒤 돌아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해 보았다. 양말을 신겨주려면 이 자세가 괜찮아야 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심한 무릎 통증 탓에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일어섰다. 무릎을 굽힐 수 없다는 건 일상생활에 엄청난 악영향을 준다. 바닥을 청소할 수도, 신발끈을 묶을 수도 없게 만드니까.
갑자기 무슨 청소와 신발끈? 의아할 수 있지만 그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불편했던 모든 상황들이 조각조각 떠오르며 나를 옭아맸다. 그렇게 자기 연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이유는 큰 게 아니다. 억누르고 살던 것들이 치가 떨리게 지겨워졌을 때 삶에 대한 긍정을 잃는 것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모든 걸 빼앗긴 기분이었다.
결국 간호사 선생님께 동생을 부탁했다. 나를 뭐라고 생각할 지보다 스스로 무능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이 무릎만 아니었으면. 아니었으면.'
어렸을 때는 기껏 해봐야 학교-학원에서만 머문다. 그렇기에 일상생활 중에 특히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드물다. 게다가 어디가 좀 안 좋다고 하면 친구들이 나서서 걱정해주기도 한다.
평범하게 내 생활을 했을 뿐인데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는 선생님도 있다. 아마 그래서 괜찮았던 것 같다. 불편함을 특별함이라고 여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보니 어릴 적만큼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약점은 말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된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전부 드러내고 살던 걸 안으로 감추려고 하니 어렵게 느껴지는 거다.
무릎만 아프면 모르겠는데 가장 속상한 건 몸이 기운다는 것이다. 약한 왼쪽을 두고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힘을 주게 된다. 넘어지는 걸 보호하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다 보니 이곳저곳이 아프게 됐다.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려서 몰랐던 거다. 목도 허리도 무릎의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는데.
남들보다 일찍 아프고 오래 아픈 인생. 어디까지 참아주고 견뎌야 하는지 모르겠다. 현실이 힘들수록 자꾸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계속 이렇게 살진 않겠지.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해지겠지 하며 나를 달랜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은 우리들이 자기만의 색깔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선가 되지도 않는 말로 설교를 늘어놓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차다. 의지가 없어서, 마음이 나약해서 제 할 일을 미루기만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마음과 다르게 몸이,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 빌어먹을 노력조차 못 해보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할 뿐.
그래도 하나 분명한 점은, 어떻게든 오늘 하루는 지나간다는 거다. 아무리 힘들고 지겨운 하루라도 쉼표를 잘 찍고 넘어가면 다음 문장을 시작할 수 있다.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누리지 못하고 좁은 방에 콕 박혀 있는 동안, 진정한 내 모습을 잃을까 두려웠다. 늘 밝기만 하던 나인데 이렇게 어두운 모습도 가지고 있다니 신기했다.
자신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무언가 새로 시작할 때 느꼈던 설렘, 작은 성취 하나에도 벅차게 기뻐하던 모습을 잊지 않아야 한다. 환경에 따라 성격은 변할 수 있어도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신의 소년, 소녀가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있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눈물이 많아졌다. 가만히 있으면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오곤 한다. 눈물샘에 찍힌 눈물점 때문인가 싶어 지워버릴까도 고민했지만 때로는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쌓아두면 병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울고 나면, 자고 나면, 이고 가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질테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정말 힘들다. 아무리 마음을 써도 그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음에 언제나 미안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힘든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될 것을 알지만 이 한마디는 꼭 해주고 싶다.
잘하고 있다고. 잘 될 거라고. 틀림없이 좋아지고 있는 과정일 테니 걱정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