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완결) - 바드러운 무릎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
소녀는 여전히 아픔 속에 살지만 전처럼 괴로워하진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노력한다. '언젠가는'이라는 말 보다 '오늘은'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 미래에 기대지 않고 현재를 살아간다.
소녀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풍경을 나눠보려 노력하고, 마음의 길을 넓혀 못 가는 길 없게 한다. 무릎이 없으면 팔꿈치로라도 걷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스스로 갇혀 있던 방 문을 연다.
비 오는 날이면 여전히 미끄러운 길을 걷기 무섭다. 하지만 소녀는 피하지 않는다.
긴 장우산을 지팡이 삼아, 지고 걷는다. 내리는 비쯤은 모자로 막으면 그만이다. 몸은 젖어도 마음은 젖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이 가볍다.
풀잎이 젖으며 나는 냄새, 차갑고 촉촉한 물방울, 기분을 좋게 하는 선선한 바람이 한데 모여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추억이 된다.
소녀는 평범한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다. 수만 명이 같은 자리를 밟고 지나갔지만 아직까지 휘청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 소녀가 지나는 순간, 자그마한 조약돌이 신발 밑으로 굴러 들어간다.
소녀는 순간 크게 휘청인다.
넘어질 뻔하다 중심을 잡으면서 다른 곳까지 다치기 일쑤다. 허리와 목, 발목과 발등에 즉각적인 통증이 나타난다. 심장까지 곤두박질친다.
주변 사람들이 소녀를 쳐다본다. 어떠한 악의도 없지만 눈치 빠른 소녀는 그들의 눈빛에서 애처로움을 읽어내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주눅 들지 않는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해 갉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존감'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 주느냐에서 오는 '자기 확신'이다.
소녀는 안다. 자신의 모습 중에 못난 건 하나도 없다고. 약한 게 꼭 약점이 될 필요는 없다고.
소녀는 살아남는 법을 찾아냈다.
지금까지는 버스에 오르고 내릴 때 한없이 떨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불안에 떨었다.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서 목적지를 지나쳐 내릴까도 고민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소녀는 크게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턱 없이 높은 계단을 바라보며 진땀을 빼는 대신 당당하게 외친다.
"기사님, 죄송해요. 다리가 불편해서 조금만 천천히 내릴게요!"
이 한 문장으로 어떤 욕도 얻어먹지 않는다.
세상이 소녀에게 조금은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먼저 인사한다. 버스에 막 오를 때도 '감사합니다.' 고개 숙이는 걸 잊지 않는다. 그 뒷말은 아마도 '잘 부탁드려요.'겠지.
소녀는 아직도 하지 못한 말이 많다며 꾸역꾸역 서툰 글자를 써 내려간다. 소녀는 평균보다 10cm 이상 키가 작다. 아무리 부모님이 주는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어도, 방에 불을 끄고서 일찍 잠에 들었어도, 성장판을 다치며 성장기를 보냈기에 바꿀 수 없는 결말이었다.
중요한 건 마음의 성장이란 걸 알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크는 요즘 아이들을 볼 때면 내심 부럽기도,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속으로 울지 않는다. 너무 억울해 못 견디겠는 날엔 차라리 소리 내어 울어버린다. 그러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너무도 예쁜 노을이 퍼져 있으면 또 위로를 받는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소녀는 침대에 누울 때, 돌아가는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다리에 통째로 힘을 줘 하나씩 천천히 내려놓는다.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에 번갈아가며 힘을 뺀다.
가족이나 친구, 또는 연인이랑 누울 때 다리가 겹치면서 무릎을 건드려지면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 하지만 아무 일도 없던 척 태연하게 군다.
긴장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이런 불편함은 다른 사람 모르게 하고 싶다. 은밀한 내면의 상처까지 들키고 싶지 않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은 이런 위태로운 삶을 영원히 모르고 살아갔으면.
오래 걸어서 다리가 피곤한 날, 아니면 다른 이유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날엔 가만히 누워 있기도 불편하다. 무릎이 붕 뜨는 느낌이 들어서다.
소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차라리 책상에 앉아 뭐라도 한다. 이물감이 드는 이유를 부러 찾지 않고 무시한다. 무시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불편한 몸을 갖고 태어난 게 슬프지는 않다. 같은 양지에서 자랐어도 모양이 제각기 다른 딸기를 보며 자신도 틀린 게 아닌 다른 거라고 이해한다. 입에 넣은 딸기 한 알이 무르게 씹힌다. 새콤달콤한 맛이 온몸에 퍼진다.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꼭 자기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고 싶어 했다. 자신의 아픔이 너무도 특별하게 느껴져서 모르는 사람한테도 본인이 겪은 다양한 일들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고 작은 아픔이 쌓일 때마다 기록할 자료가 늘어난다 생각하고 오히려 좋아라 했다. 생각이 짧은 건지, 아니면 깊은 건지 알 수 없다.
소녀는 원래 가상의 스토리에 자신을 쏙 빼닮은 캐릭터를 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자신의 병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증상을 설명한다고 한들, 독자로부터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소녀의 아픔은 외로운 것이었다. 오로지 본인만 아는 감정과 느낌이었다. 타인은 상상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병.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껏 친하게 지내오던 무릎이 낯설게 느껴졌다. 설명할 수도 없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외로움이 소녀의 밝음을 천천히 빼앗아갔던 것 같다.
소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재미있게 써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글의 장르부터 바꿨다. 솔직 담백하게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아왔다. 글을 쓰는 두 달의 시간 동안 소녀는 말 그대로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무엇보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위로와 응원을 아낌없이 받았다. 시간 내어 부족한 글을 읽어준 다정한 독자들 덕분이다. 소녀는 더 이상 자신 앞에 펼쳐질 미래가 두렵지 않다. 앞으로 몇 번을 다시 넘어진대도 결국엔 이렇게 일어섰던 경험을 교훈 삼아 잘 헤쳐나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녀는 여전히 아팠지만 씩씩했고, 불편했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던 어린 날을 회상한다. 그때보다 더 짙은 어둠이 소녀의 어깨를 짓누르지만 당당히 고개를 들고 몰아쳐오는 불행과 맞선다. 딱 한 번만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수천 번을 빌어도 신은 들어주지 않았기에 더 이상 지나온 과거에 미련두지 않기로 했다.
소녀의 마음 안에서 살아 숨 쉬던 어린아이가 차츰 희미해져 간다. 그제야 그립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재생된다. 그 안에서 지금과 똑같이 기쁨과 슬픔, 환희와 분노의 감정을 마주한다.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왜?"
"재밌을 것 같아서."
소녀는 허리를 숙여 어린아이와 눈을 맞춘다.
"힘든 일이 많을 텐데 괜찮겠어?"
어린아이는 맑은 웃음으로 대답한다.
"내가 못 이겨낼 리 없잖아."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아이는 사랑을 먹고 소녀가 됐다. 소녀의 세상이 넓어졌다.
호로록.
막 끓인 차에서 깊은 향이 올라온다. 손톱달이 창을 비추는 밤, 소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모든 병을 깨끗이 낫게 한다는 명의를 만났다.
"제가 알아서 해드릴게요."
무심하지만 믿음직스러운 그 말을 지표 삼아 걷는다. 소녀에게도 과연 평안이 찾아올까. 지긋지긋했던 아픔을 떼어버릴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와 당신이 아는 소녀라면 잘 해낼 거다. 보란 듯이 이겨낼 거다.
살다가 풍량을 만나 휘청일 때, 인생이 이렇게 끝날까 봐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세상은 이렇게 지지 않는다. 반드시 다시 피어난다. 힘들었던 시간도 다 지나고 한 철의 아쉬움도 없이 행복해질 거다.
별 거 아니다. 그러니 다 괜찮다.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오름달이라는 이름으로 첫 문장을 쓸 때,
누군가 끝까지 함께 해 줄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새, 하나둘씩 모인 발자국 덕분에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서툰 솜씨로 글을 써 내려가면서도 이게 맞을까, 어떻게 써야 더 좋은 글이 될까 수만 번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저 '오늘 하루를 아낌없이 잘 살아내자.'는 용감한 포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성장을 함께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소소한 울림을 전하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곧 다시 만나요.
안녕!
이 이야기가 어느 날의 조용한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물오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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