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좋은 아이가 포기할 때, 평범한 아이가 끝까지 하는 이유
"아빠, 이거 봐요."
중2 첫째 W가 시험지를 내밀었습니다. 20점. 네, 100점 만점에 20점입니다. 200점 만점도 아니고요.
순간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일단 소리 한번 질러야 하나?' '내가 뭘 놓쳤지?' '이 녀석, 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구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안도감마저 들었어요.
사실 W는 제가 그동안 관찰하기에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친구예요. 전 세계 국기를 다 외우고, 변신로봇과 포켓몬에 대해서는 백과사전 수준입니다. 가족끼리 "우리 거기 언제 갔었지?" 같은 대화를 나눌 때도, 큰아들의 기억이 가장 정확합니다. 암기력이 나쁠 리 없는 아이였죠.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게 내 아들 성적이 맞나?' 싶은 점수를 받아오기 시작한 거예요. 역사 교과서를 펼쳐보니 2페이지만 밑줄이 그어져 있고, 나머지는 새책이더군요. 아예 공부를 안 했던 겁니다.
자, 성적표를 받아오기 시작하는 중2, 아들이 20점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백하자면, 저도 그런 아이였습니다.
"야, 너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래."
학창시절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들었던 말입니다. 근데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어요. '노력? 그거 머리 안 좋은 애들이나 하는 거 아냐?'
큰 착각이었죠.
순발력과 재치로 대학도 적당히 갔고, 회사도 적당히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적당히'의 한계가 너무 빨리 왔다는 거예요. 차장을 달고 나니 더 이상 '번뜩임'만으로는 안 되는 일들이 생겼거든요.
프로젝트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끈기,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회복력, 지루한 반복 작업을 견디는 인내심... 이런 게 필요했는데, 저한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학원을 차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창의 미술? 아이디어 하나면 되겠지!" 했다가 4년 동안 적자였습니다. 가장으로서 자존감이 무너진 암흑기였습니다.
절망적인 시기에 읽은 책이 있습니다. IoT 개념을 만든 케빈 애슈턴의 『창조의 탄생』이었어요.
'창조성의 비밀? 당연히 천재적 영감이겠지' 했는데, 책을 덮고 나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에어비앤비 창업자들 아시죠? 지금은 세계적 기업이지만, 초기엔 말 그대로 거리에서 자면서 버텼다고 합니다. 시리얼 박스를 팔아서 생활비를 벌었대요.
책의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창조는 번뜩임이 아니라 끈기의 산물이다."
앤젤라 덕워스의 『그릿』은 이걸 공식으로 만들었더군요.
성취 = 재능 × 노력²
노력이 왜 제곱일까요? 재능과 노력이 만나면 '기술'이 되고, 그 기술에 다시 노력을 곱해야 '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재능은 한 번, 노력은 두 번 들어가는 거죠.
머리 좋은 우리 W가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재능'에만 기댄 채 '노력'의 근육을 키우지 못한 거예요.
"W야, 아빠가 물어볼 게 있어."
20점 시험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네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궁금해. 점수 말고, 과정 말이야."
아이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습니다.
"그냥... 한 번 읽고 외우려고 했는데 안 외워져서..."
"그래? 그럼 우리 다이어트하는 사람 얘기 해볼까?"
저는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었습니다.
"살을 빼려면 좋은 음식을 적당히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런데 매일 체중계만 보면서 '왜 안 빠지지?'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우리가 매일 확인해야 하는 건 체중계 숫자가 아니라, 오늘 좋은 음식을 먹었는지, 운동을 했는지를 실천하고 기록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살도 빠지고 건강한 몸이 되는 거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너가 20점을 받아왔다는 건 식단과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았다는 의미야. 지금과 같이 한다면 앞으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날부터 우리는 함께 W의 공부 과정을 점검했습니다. 문제는 명확했어요.
• 어렵거나 재미없으면 바로 포기 → 유튜브와 역사 만화책으로 흥미를 일으키기로 했습니다.
• 한 번 공부하고 끝 → 수업을 중심으로 예습-복습을 연결하고, 매주 수요일은 '복습 데이'로 정했습니다.
• 한 번 본 것은 안다고 착각 → 그날 배운 내용을 아빠에게 전화로 설명하게 했습니다.
• 수학 문제 푸는 시간 부족 → 막힘 없이 풀 때까지 교과서를 반복해서 풀게 했습니다.
이 중 가장 좋았던 변화는, 아이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아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은 지구의 둘레를 구하는 법을 배웠는데, 어떻게 하냐면요..."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조잘조잘 설명해주는 아이의 목소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물론 제가 모든 얘기를 귀담아듣지는 못해요. 그래도 열심히 끄덕끄덕 알아듣는 척하는 건 저희끼리의 비밀입니다.
둘째 S는 태권도 3단입니다. 첫째는 4단이고요.
특별히 운동신경이 좋아서? 아니요. 유치원 때부터 한 번도 안 쉬고 8년을 다녔을 뿐입니다.
"아빠, 친구들이 저보고 태권도 천재래요!"
"천재? 네가? 푸하하!"
"아빠! 진짜라니까요!"
"S야, 너는 천재가 아니라 '끈기 부자'야. 남들이 게임할 때 너는 도장 갔잖아. 그게 쌓여서 3단이 된 거야."
아이가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저는 노력 천재네요?
"그래! 그게 진짜 천재지!"
요즘 W는 시험 점수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해요.
"아빠, 이번엔 문제집 3번 반복했어요." "수학 막힌 부분을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오늘 아침에는 어제 영어 공부한 거 복습했어요."
점수요?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1년 뒤에 다시 공개할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이가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부모들은 늘 조급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원하죠. 하지만 진짜 교육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일어납니다. 아이가 '다시 해볼게요'라고 말할 때, '어려워도 끝까지 해봤어요'라고 자랑할 때, 그때 진짜 성장이 시작되는 거예요.
똑똑한 것보다 끈기 있는 게 낫고, 재능보다 노력이 제곱으로 강하다는 걸, 이제야 우리 부자는 함께 배워가고 있습니다.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저도 여전히 실수하고, 가끔은 점수에 일희일비하기도 해요.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알았습니다. 아이의 20점 시험지가 '실패'가 아니라 '시작점'이라는 걸. 그리고 그 시작점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걸 말이죠.
오늘 저녁, 아이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오늘 네가 가장 열심히 한 순간이 언제였어?" 그리고 그 순간을 구체적으로 칭찬해주세요. "30분 동안 핸드폰도 안 보고 집중한 네가 정말 멋있었어."
뇌의 도파민 보상 회로는 '결과'보다 '과정의 작은 성취'를 인정받을 때 더 강하게 활성화되어, 지속 가능한 동기를 만들어냅니다.
"틀려도 돼. 다시 해보는 네가 진짜 용감한 거야. 그 용기가 너를 더 크게 만들 거야."
아이의 진짜 성장은 점수가 아닌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노력하는 마음을 먼저 보고, 그리고 칭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