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장동이
가을의 슬픈 가수에게 –라고 써 보았다.
귀뚜라미에게 –보다는 낫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귀뚜라미가 받으면
무척 당황할 것 같았다.
또박또박 쓴 편지를 나는
그냥 간직하기로 했다.
그럼 귀뚜라미도
아무 거리낌 없이
마음껏 이 가을을 노래하겠지.
계단논/하청호
멀리서 보면
산은
서랍을 층마다
조금씩 뻬놓았네
골고루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알맞게 빼놓았네
서랍 속에는
어린 벼들이
파릇파릇 자라네
가을에는
서랍마다
알곡이 소복이
담기겠네.
가을배추/이현영
가을에
피는 꽃 중에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자라고
가장 환하게 웃고
가장
맛있는 꽃
그다음 오늘이 할 일은/오규원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에 놓아두고
그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 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몇 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 놓고
그다음 오늘이 할 일은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
마중 가는 일이다
사과/박예분
잠깐
부탁인데
아직 따지 마세요!
저는요
가을 햇살에 더 발갛게
익어야 하는
풋사과랍니다
센바람님도
그냥 지나가 주세요!
분천 분교/박혜선
아이들과 선생님은 떠났지만
학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로 했다
책 읽는 소녀가 학교 화단에 남아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큰 칼을 차고 소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님, 장군님. 무거운 갑옷 입고 얼마나 더우세요?”
화단에 난 풀들을 덩굴손 칭칭 감아 옷을 입혀주었다
“장군님, 장군님. 큰 칼도 내려놓으세요.”
큰 칼이 푸릇푸릇 나뭇가지가 되었다
풀벌레들이 장군님 몸을 오르내리며 놀았다
참새가 어깨에 내려앉고 칼 끝에 잠자리가 쉬었다 갔다
드디어 오늘,
책 읽던 소녀는 나팔꽃 원피스를 입었다
꽃무늬 원피스 나풀거리며 고무줄놀이하기 딱 좋은
초가을 아침이었다.
사과나무 심부름/하지혜
과일농사 짓는 삼촌에게
사과나무가 일을 시킨다
-봉지 쒸워
-겉봉지 벗겨
-속봉지 벗겨
-이제 따서 담아
사과나무 심부름하느라
이 가을 삼촌 얼굴도
발갛게 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