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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 Nov 26. 2024

26. 살면서 우울감을 느낀다면....(1)


2022년 봄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뒤늦게 정주행으로 보았다. 정말 재미나게 그리고 울면서 보았다. 각자가 각기 다른 사연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서로를 위로해주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마치 다큐처럼 잘 그려낸 감동적인 드라마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에 가수 최성수의 「위스키 온 더 락」 노래를 듣다가, 이 드라마의 OST이란 걸 알고 보게 되었는데, 다양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걸 생각했다. 부모 자식이란, 친구란, 가족이란, 젊은 사랑이란, 형제간의 끊지 못하는 정이란, 오래전 애인은, 이웃이란, 엄마에게 자식이란, 끝내 말하지 못하는 말이란,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란, 추억이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여기서 「블루스」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왜 작가는 이 드라마의 제목을 「우리들의 블루스」라고 했을까? 우리들의 춤이란 뜻인가? 사실 난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블루스는 춤의 일종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남녀가 서로 붙잡고 조용히 리듬에 맞춰서 추는 춤. 소시 적에 나이트 가면 신나게 디스코 음악에 맞춰 막춤 추다가, 끝날 때쯤 블루스 타임이 되면 무대에서 조용히 내려갔던 기억. 그게 내가 아는 블루스였다.(무식이 하늘을 찌름)     


아주 정말 우연히 드라마를 보는 도중에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선생님의 음악평론을 몇 개 보게 되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미국과 한국의 1960년대 이후 음악사를 강의하신 건데, 거기서 블루스라는 음악장르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다른 이야기지만, 이 강의를 듣다가 가수 송창식씨가 우리 음악사에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란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조금씩 알게 되면서 약간의 지적인 희열을 느낌)     


강헌 선생님은 이 블루스라는 음악이 ‘기본적으로 말할 수 없는 흑인들의 슬픔이 만들어낸 음악’이라고 이야기하신다.(슬픔이라고? 난 블루스를 못 추지만, 블루스 음악 들으면 좋던데....) 19세기 말 미국에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들이 노예해방 후에도 팍팍한 노동과,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삶의 애환을 잔잔하게 이야기하듯이 노래한 음악 장르로, 후에 재즈, R&B, 락엔롤, 락 음악의 뿌리가 된다고 한다.     


블루스는 영어로 Blues다. 우리가 아는 푸른 이라는 뜻의 Blue의 복수형인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우울과 슬픔을 의미하는 Blue Devils가 어원이라는 게 다수설이란다. 시간이 흘러 블루만 남아 블루스(Blue Devils)가 되었고, 불안상태 혹은 우울한 상태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Blue는 푸른, 파란 뜻 외에 창백한, 새파래진, 질린, 우울한 이라는 뜻도 같이 갖고 있다. 그래서 feel blue하면 우울하다는 뜻이 된다.(저 푸른 하늘이 우울함으로 연결된다는 게 사실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여러분은 가끔 우울함을 느끼는가? 아니면 지금 마침 우울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우리 같은 직장인들은 일요일 오후 석양이 질 무렵부터 우울해지기도 한다. 주말 이틀을 편히 쉬었는데, ‘내일 아침엔 또 직장에 나가야 되는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월요병」이란 것도 있다. 지겨운 한 주가 또 시작되는 것이다.(퇴근 같은 즐거운 출근은 없는 것일까?)     


나도 상당기간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다. 사실 정신적인 문제라 밝히기가 좀 꺼려지기도 하지만, 요즘 그때의 나와 같은 우울함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꽤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서, 그들에게 나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우울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선생님이 그 사이 직업을 바꾸셔서, 지금은 유명한 명리학자로 활동하고 계신다. 최근에 이분의 명리학 강의도 좀 들었다.    


명리학은 사람 개인의 운명(運命)을 내다보는 학문이다. 사람은 각자가 쓰임이 있고, 그 쓰임은 또 때가 있다는 원리다. 쓰임은 명(命), 소명, 직업, 잘하는 일 등을 의미하고, 때는 타고난 운(運)을 얘기한다. 사람에겐 10년마다 바뀌는 대운(大運)이 있고, 매년 바뀌는 소운(小運)이 있다. 그래서 각자 다른 쓰임(참고로 어느 쓰임이 좋고 나쁘고는 없다)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자기의 쓰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쓰임이 언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지를 알고 미리 준비하고, 때가 되었을 때 그걸 위해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이 명리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명리학에서 그 사람이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기준으로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면, 「신강(身强)」한 사람과 「신약(身弱)」한 사람으로 나뉜다. 다시 이를 세분하면 극신강, 신강, 중화, 신약, 극신약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중의 한 부류에 속하게 된다.      


신강과 신약의 기준은 몸이 건강하고 강하냐 약하냐의 구분이 아니라, 자신이 또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 등이 외부의 영향보다 강하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한다. 무슨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주장을 가지고 판단하고,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또는 눈치 등을 많이 보는 경우는 신약이다. 반대로 주변에 영향을 덜 받고, 내 생각과 주장을 펼쳐나가는 사람은 신강이다.     


보통 신약은 신강을 부러워한다. 나도 저 사람처럼 자신있게 자기 주장을 얘기하고 멋있게 살았으면 한다. 하지만 절대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명리학적으로 신강한 사람들은 거목이 일거에 쓰러지듯 대개 중간에 부러진다. 소위 한방에 훅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기를 너무 믿으니, 잘못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리고 뭔가 잘못되면 신강한 사람들은 바로 우울에 빠지기 쉽다. 자기 생각대로 안 되면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고 우울해진다.      


반면에 신약의 사람들은 골골 팔십이라고 큰 굴곡 없이 인생이 흘러간다. 뭐 대단한 일을 모색하지도 않지만, 대신 실의에 빠질 일도 없다. 모든 게 큰 문제 없이 지나간다. 서양의학에서 진단하는 우울증은 동양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신강한 사람들을 더 선호한다.     


나는 명리학적으로 볼 때 신강에 속한다. 극신강까지는 아니고, 나름 강한 신강이다. 그래서 나도 상당 기간 우울증 증세를 앓았다.(그렇다고 신강한 사람들이 다 우울증을 앓는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오해 마시길....)     


그때는 정말 괴로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몸은 앞뒤로 흔들리고, 머릿속은 항상 ‘내가 잘 못 했어’라는 생각으로 괴롭고,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할 수 없다 또는 하다가 잘못되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앞서고, 잠을 깊이 못 자고 선잠 자듯이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자주 악몽(군대를 가야 한다 또는 고시를 다시 봐야 한다 등)을 꾸고, 또한 가족이나 친한 친구 외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심지어 집 주변 외 바깥 출입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한 달 정도나 나가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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