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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선 Nov 27. 2024

27. 살면서 우울감을 느낀다면....(2)

난 우울증을 이렇게 극복했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2016년에 2년간의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사회적경제과장 직책을 맡았다. 사회적경제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고 시작했지만, 그 분야 사람들과 열심히 접촉하고 현장을 공부하고 해서, 시간이 좀 지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그쪽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서울의 사회적경제 붐을 일으켜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는 사명감도 충만했다. 사회적경제 국제회의에도 여러 번 나가서 서울의 사회적경제 현황을 브리핑하고, 은근히 자랑까지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사회적경제 자체가 쉽지 않은 분야였다. 내 생각이 짧았다. 경제도 어려운데 하물며 사회적경제는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갈수록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분야에 오래 계신 분들은 “다 그런거예요.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한다. 내가 벌써 2년째 노력하고 있는데, 내 눈에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데....     


그렇게 남모르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사건이 터졌다. 당시 협동조합지원센터를 우리시에서 지원하여 민간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센터장님께서 갑자기 사표를 내셨다. 내가 센터의 운영이 미흡하다고 뭔가 조치를 좀 해달하고 서울시 협동조합협의회 이사장님께 말씀드린 게 화근이었다. 내가 그 센터장님을 인사조치해 달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말 한마디가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해서 집에 가고 있는데, 그 센터장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부로 사표를 냈고, 그동안 고마웠고, 앞으로도 센터를 잘 부탁합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심하게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그다음 날부터 출근하기가 어려웠다. 내 탓이라는 생각에, 내 경솔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일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울감에 서서히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센터장님의 사표가 촉매제가 된 것이다.      

한 달 동안 아내와 친구들의 극진한 캐어를 받으면서, 정신과 처방으로 우울증 약도 먹고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주말마다 찾아와 북한산 둘레길 산책도 하고 맛있는 보양식도 사주었다. 고마운 친구들.... 고맙다. (너희도 혹시 그리 되면 나도 똑같이 해주께)     


내 나름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되지’ 다짐하며, 걷거나 자전거 타기 운동도 했다. 어느 날인가 혼자 밤중에 자전거 타고 나갔다가 인적이 드문 길에서 ‘아! 이러다가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하는구나, 나도 이 상태가 지속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그렇게는 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혼자 다짐도 했다.     


다행히 사무실에 못 나간 지 한 달이 되어갈 쯤에, 팀장님 두 분이 우리 집까지 오셔서 “과장님, 지금 사무실은 잘 돌아가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요, 나오시더라고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나오기만 하셔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내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사무실에 나가기로 약속했다.      


그리곤 일요일 오후에, 차마 내일 아침에 혼자서 사무실까지 갈 용기가 없어서, 아내에게 부탁하여 사무실 출근 연습을 하였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지하철 타고 서울시 청사 바로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다.(애기 같이....)     


다음 날 아침, 마음을 다잡고 출근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실 사무실 문을 여는 것 자체가 겁도 나고 제일 어려운 순간이었다. 다행히 많은 직원분들이 반겨주고 괜찮으시냐고 묻고 해서,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셨다.     


이렇게 다시 출근해서 일은 하는데, 아직 우울 증상은 많이 남아 있었다. 평소에는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했는데, 내가 봐도 목소리가 자신이 없이 기어 들어가고, 얼굴 표정도 어딘지 일그러져 있었다. 쉽게 피곤하고, 어디 누워서 좀 쉬고 싶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고, 국장님이나 시장님께 보고할 때도 자신감이 없고, 웬지 잘못했다고 얘기하실까봐 두렵고 그랬다.      


6시 되면 땡 퇴근해서 사무실을 나오고, 가급적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집까지 오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그 전에는 마치 연예인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아는 척을 하고, 길에서도 하이파이브를 했던 나였는데....) 집에 도착하면, 심신이 지쳐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고, 그저 누가 나를 건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만 있었다. 유일하게 늦은 밤에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집 근처 공원을 여러 바퀴 같이 돌아줬다. 그 시간엔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으므로 마음이 좀 편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티고 있었다. 이때 반전의 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나를 좋아하는(?) 우리과 팀장님(나보다 2살 많은 형뻘이시고, 지금은 공로연수 중이시다) 한 분이 내 방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과장님, 오늘부터 저랑 퇴근하고 바로 탁구 치시죠? 제가 시의회에 근무했었는데, 의회 건물 빈 방에 탁구대가 있습니다. 우리 둘만 칠 수 있습니다.” 나는 살짝 고민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동의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바로 탁구를 쳤다. 지금도 있는 서울시의회 본관 건물(뾰족한 건물) 8층에 오래된 탁구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다리에 힘이 없어 8층까지 올라가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다리에는 힘이 없고 허리도 아프고 해서 탁구 치다가 자주 쉬기도 했다. 그 팀장님이 끝까지 쳐야 한다고 독려해서 둘이서 거의 3시간 정도씩 매일 탁구를 쳤다. 다행히  탁구는 내가 중학교 때부터 조금씩 쳤고, 서기관 교육받으면서 6개월 동안 매일 저녁마다 탁구장에서 살다시피 해서 조금는 칠 줄 알았다. 그 팀장님은 변칙 스타일로, 나보다 한 두수 위였다.     


그렇게 매일 탁구를 치다보니 다리에 힘도 좀 붙고, 허리도 점점 아프지 않고, 무엇보다도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이 기간 중에는 철저히 술을 끊었다. 담배는 끊지는 못했지만, 몸이 안 좋으니 별로 생각이 없었다. 한여름 몇 개월을 그렇게 둘이서 탁구를 쳤다. 온몸이 땀으로 절을 때까지....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심신이 안정되어 가면서 회복세를 타기 시작했다. 여전히 전과는 많이 달랐지만, 더 이상 휘청거리거나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서는 그 팀장님과 청계천을 걸었다. 둘이서 옛날 소시적 이야기부터 집안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을 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시청에서 시작해서 마장동까지도 걷고, 청계천 따라 걷다가 성북천으로 올라 한성대입구역까지도 걸었다. 땀이 나고 다리에 힘도 붙고, 목소리도 힘있게 나오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집(아파트)에서 계단 오르기 30분 정도로 다리를 단련하고 땀을 흠뻑 흘렸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 잘못이 아니야, 누구라도 그랬을거야, 이젠 괜찮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우울증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약은 출근하면서부터 먹지 않았었다.     


결국 7∼8개월이 지난 후에, 나는 비정상적인 모습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래도 완벽하게 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직도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켠에서는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반쪽짜리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울증 초기 증상이었음에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단은 살게 되었다. 자살 뭐 이런 생각은 그 후론 전혀 없었으니까....        


이 자리를 빌어, 아내와 친구들과 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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