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남쪽으로 내려왔다. 군산, 김제, 부안, 영광을 지나고 무안과 목포를 거쳐 해남반도(海南半島)에 다다랐다. 두륜산(頭輪山)이 끼고 있는 대흥사(大興寺)와 달마산(達摩山)의 미황사(美黃寺)를 순례했다. 그리고 한반도 최남단의 지점이라는 땅끝마을 토말(土末) 해안을 달려 땅끝 바닷가마을의 호젓한 펜션인「바다의 향기」에 여장을 풀었다.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선 덕에 오늘의 목적지에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남으로부터 강진, 장흥, 보성, 벌교, 그리고 별량을 거쳐 순천에 이르는 120km의 거리를 2시간 30분을 달려 9시 30분쯤 정원박람회 전시장에 도착했다.
순천 시내로 들어서면서는 가로수로 심어진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것만 같았다. 생명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순천만정원박람회는 자연과 인류가 상생하는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한다. 발소리를 낮게 하면 꽃이 피는 소리, 나무가 새를 불러들이는 소리가 들리고, 갯지렁이가 걸어가는 길의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순천만의 정원에서 활짝 가슴을 열어 생명과 삶의 환희를 마음껏 누리고 자신의 우주를 깨워내라고 말한다. “ECO와 GEO”라는 로고와 “시간이 지날수록 수목이 울창해지고 그 가치가 높아지는 미래형 박람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건『2013 순천만정원박람회』는 2013년 4월 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6개월 동안에 걸쳐서 열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정원박람회다. 국제정원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순천만정원은 제1호 국가정원의 타이틀도 얻었다.
동천(東川)은 순천시를 양분해서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강이다. 하지만 순천으로부터 여수와 광양을 동쪽에 두고 있기에 이 강을 동천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순천만 어귀로부터 동천 물줄기를 따라서 양편으로 길쭉하게 펼쳐진 강 연안과 순천만 일대 100만 ㎡(약 33만 평)의 넓은 부지가 순천만정원박람회장이다. 북쪽의 성문으로부터 정원이 펼쳐져 있다. 성문 입구 부근에는「생태」,「환경」,「자연」이라는 뜻의 ECO와「지구」,「토양」,「지리학」이란 의미의 글자인 GEO, 그리고 이번 박람회의 마스코트인 흑두루미가 함께 디자인된 박람회 로고가 세워져 있다. 한편 그곳의 ‘나무도감원’을 시작으로 정원이 시작된다. 나무도감원에는 노산 이은상 시인의 시「나무의 마음」이 새겨진 바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나무도감원과 실개천 너머로 이어지는 한국정원의 보도 주변에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뿌리를 잘 내린 다종다양한 우리의 나무들이 보인다. 자연미를 살린 돌담길, 그 발치의 아담한 갓길 꽃밭이 마냥 소담한 우리 정원의 이미지를 살려냈다. 계수나무와 호랑가시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밝은 빛을 맞이한다”는 뜻의「연휘문(延暉門)」이 있는 곳부터는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祕苑)과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의 하나인 소쇄원(蕭灑園)을 모방한 미니정원이 꾸며져 있다. 부용정(芙蓉亭) 연못과 세심정(洗心亭), 광풍각(光風閣) 따위의 정자와 사랑방이 재현되어 있다. 선비의 정원이라는 공간 위쪽에는 한국의 정원 전체를 조망해볼 수 있는 누대가 있다. 전망대를 오르는 길에는 듬성듬성한 소나무와 함께 노각나무, 아왜나무와 같은 이 고장 특산의 나무들이 심겨있다. 노각나무는 인근의 계족산 청소골에 자생 군락이 있고, 상록성 소교목인 아왜나무는 남해안 바닷가에 자라는 나무라고 한다.
한국의 정원 구역에서 동천을 건너는 ‘꿈의 다리’를 건너면 무궁화가든, 장미정원, 어린이정원, 갯지렁이정원 등이 있다. 그리고 호수정원과 암석정원 아래쪽으로 세계의 온갖 나라들의 정원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프랑스, 독일, 태국, 일본, 터키, 영국, 스페인, 이태리, 미국, 네델란드... 그런데 아내와 나는 꿈의 다리 근처에서 출발하는 순천만자연생태공원 행 셔틀버스를 탔다. 자원봉사 정원해설사분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순천만 갈대밭과 습지를 돌아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박람회장 아랫녘으로 15분쯤 걸려 생태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잘 가꿔진 잔디정원에는 순천만자연생태전시관과 교육관, 순천문학관 등이 자리해 있다. 잔디정원이 끝나는 곳부터는 박람회장의 꾸며진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있는 그대로의 바닷가 자연 정원 모습이 펼쳐져 있다.
순천만국가정원의 한국정원(소쇄원의 광풍각이 재현되어 있다)
대대포구무진교와 갈대숲
동천이 바다의 어귀와 만난다. 동천은 순천만이 만드는 갯벌과 바닷물을 만나 그곳으로 흘러든다. 순천만 어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대대포구(大垈浦口)가 있고 그곳부터 드넓은 순천만 개펄과 바다가 펼쳐진다. 순천만 개펄과 바다, 동천의 모습을 함께 조망해보려면 동천 왼편의 대대포구에서 그 강을 건너 너른 갈대밭 너머의 산을 올라야 한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너는 그리 길지 않은 나무다리가 무진교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霧津)’은 상상 속의 포구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 무진교의 대대포구가 소설 속에 나오는 ‘안개 포구’의 배경이 되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사람들이 아침에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신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아마도 잔디정원 위쪽에 자리한 순천문학관을 들르면 분명 그의 소설과 이곳 대대포구와 무진교에 대한 설명이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 우리는 무진교 너머의 갈대숲과 용산(龍山) 전망대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진교로부터 갈대숲을 지나 순천만을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용산 전망대까지는 2.3km의 거리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곧바로 갈대밭이 시작된다. 갈대 숲길은 바닷물이 찼다 빠졌다 하는 곳이라 나무로 만든 데크가 놓여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정도의 폭이라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위해서는 한 줄로 걷는 것이 좋다. 갈대숲으로 들어서면 온통 갈대, 산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700여 미터에 이르는 데크가 이어진다. 데크 위의 우리 어깨 또는 머리 높이쯤의 갈대 무리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데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갈대숲 사이사이에는 칠면초, 퉁퉁마디(함초), 갯개미취, 해홍나물 등 여러 종류의 갯벌 식물들이 자생한다. 바닷물이 빠져나가 질척한 갈대 속 갯벌 위에는 짱뚱어, 논게, 칠게, 붉은발말똥게, 도둑게 따위가 산다고 한다. 또 갈대숲에는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검은머리물떼새, 먹황새, 검은머리갈매기, 말락꼬리마도요 따위의 새들이 찾아든다고 한다. 테크에서 울리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짱뚱어와 게들이 놀라 소스라친 듯 갈대밭, 땅속으로 잽싸게 몸을 숨긴다.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의 서걱거림 소리와 갈대숲 갯벌을 부산스레 오가는 온갖 생명체들의 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순천만 갈대밭(자료: 네이버블로그 비누향기 커피향기)
순천만 습지와 개펄
순천만(順天灣)은 5.4㎢(160만 평)의 빽빽한 갈대밭과 잘 보이지 않는 22.6㎢(690만 평)의 광활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 230여 종의 철새, 30여 종의 갯벌 식물, 여러 종류의 갯벌 생물이 살아가는 생태의 보고다. 순천만은 2003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람사르국제협약에 의한 습지로 등록되었다. 이어서 2008년에는 순천만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4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순천만은 독특한 생태의 갯벌 자연과 환경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기도 하지만, 땅과 바다, 강과 하늘이 어우러져서 시간과 계절을 불문하고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천혜 자연의 명승지이기도 하다.
순천만의 모습을 높은 곳에서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을 향해 산길을 걸었다. 용산의 동쪽 산자락 끝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길은 갈대밭과 데크가 끝나는 곳에 야트막한 산으로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언덕으로 이어진 구릉과도 같은 산이다. 완만한 구릉의 산길이 1.5km쯤 이어지다가 그곳에서는 가장 높은 용산의 언덕바지에 오르게 되고 그곳에 순천만 전망대가 자리해 있다. 그 높이가 77m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순천만 바다와 갯벌은 물론 육지 쪽 평야와 그 너머의 도시 모습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한두 군데의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30분쯤의 구릉진 산길을 걸었다. 길가로 소나무, 리기다소나무, 참나무, 아카시아 따위의 친숙한 나무들이 우거져있다. 산길이 허공으로 벗겨진 곳에서는 이따금 갯벌과 평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순천만으로 내려 흐르는 동천의 모습(자료: 네이버블로그)
전망대에 오르면 서편으로 확 트인 하늘과 갯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유연한 물 구비의 동천과 진흙 빛 개펄, 초록빛 평야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갯벌 습지와 연이어진 대대들 평야에는 ‘WELCOME/바다의 정원 순천만’이라는 2줄의 거대한 글귀가 살아있는 식물의 조형으로 새겨져 있다. 순천과 순천만이 땅과 바다, 산과 강이 경이롭게 어우러져 살아 숨 쉬는 한국 최고의 생태 도시라는 닉네임이 전혀 무색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낮의 썰물 때이어서인지 굽이진 동천의 아름다운 물줄기가 나타나고 너른 갯벌이 햇빛에 반짝거리는가 하면 걸쭉한 진흙 빛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때가 돼서 바닷물이 들어차면 순천만으로 흘러내리는 동천 물줄기는 바닷물에 잠기고 갯벌도 바닷물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기울어진 오후의 햇살, 저녁의 황혼빛에 물드는 강줄기와 갯벌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저녁 해가 떨어지는 시간 바닷물이 완전히 빠져나가 동천의 물줄기가 완연히 드러나고, 빗겨 드는 햇살에 황혼이 지는 시간 즈음에 순천만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고 사진을 찍고 있던 어느 사진작가가 말해준다.
전망대에서는 대대포구로부터 벌교 쪽 화포해변으로 이어지는 순천만 뚝 길이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10km에 이른다는 그 뚝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뚝 길 멀리 별량면 학산리의 화포해변에서 맞이하는 일출이 장관이라고 한다. 또 동천 하구 동편 와온해변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한다. 어느 봄날이나 가을날 하루 화포해변에서 이른 아침의 일출을 맞이하고 그 햇살을 받으며 순천만 뚝 길을 걸어 용산 전망대에 오르고 순천만 일대의 풍경을 감상한다. 그리고 와온해변으로 걸어서 하루해가 지는 일몰과 저무는 황혼을 바라본다. 언젠가는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여행이다.
용산 전망대에서 본 순천만 일몰(자료: 네이버블로그)
꿈결에서 본 듯한 풍경을 뒤로하고 포구 쪽으로 되돌아오는 길, 갈대 숲길을 벗어날 무렵 세찬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생태공원 쉼터의 스낵바를 찾아들었다. 다소 늦은 시간 레몬차와 우리 밀 빵으로 간단한 점심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라 정원박람회장으로 돌아왔다. 해룡천을 따라 조성된 여러 형태와 모양의 정원 공간, 십 수 개국의 정원을 구경하다 보니 힘도 들고 시간도 많이 흘렀다. 국제정원박람회라는 이름에 걸맞듯 Restaurant Des Terrasses de Nantes라는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가든 카페에 들려 얼음 석류주스와 복숭아주스 한 잔을 각각 마시고 정원박람회 하루 유람을 마쳤다. (2013.8.5.)
*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 지 10주년이 되는 올해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