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에서 착한 사람까지
어릴 때 나는 ‘착하다’라는 말을 듣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다른 칭찬보다 그 말이 더 좋았다. 공부를 잘한다거나 똑똑하다는 말보다도, “너는 참 착하구나”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착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나는 꽤 많은 노력을 했다. 어른들에게 물건을 드릴 때는 항상 정방향으로 돌려서 건넸고, 바닥에 쓰레기가 보이면 일부러 주워서 버렸다. 물론 그냥 조용히 버린 건 아니었다. 주변에 누군가 보고 있다는 걸 꼭 확인한 뒤, 티를 잔뜩 내며 행동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착한 일을 했고,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예의 바른 아이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조금씩 주변에 ‘나는 착한 아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내가 처음으로 의도적으로 만든 사회적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생각보다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어른들은 대체로 나에게 친절했고, 괜히 한 번 더 웃어 주고, 용돈을 주거나 작은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혹시 실수하거나 잘못을 해도 “원래 그런 애가 아니잖아”라는 말과 함께 크게 혼나지 않고 넘어가는 일도 많았다. 착함은 나에게 무기이자 방패였다. 앞으로 나아갈 때도, 뒤로 숨을 때도 쓸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그 이득이 좋아서 나는 더 열심히 착한 아이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착한 아이’라는 네 글자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할까 봐 늘 조심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나는 제대로 혼나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혼나는 게 너무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겉으로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속은 전혀 자라지 못한 채 눈치만 늘어난 아이였다. 행동 하나하나를 계산했고, 상대방의 표정 변화와 말투 하나에 하루 종일 마음이 흔들렸다. 조금이라도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 느껴지면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내가 뭘 잘못했을까’를 되짚었다.
직장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혼나는 날이 있었다. 일이 부족해서, 판단이 틀려서, 혹은 그냥 타이밍이 좋지 않아서. 그날 하루는 완전히 망가졌다.
업무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고,
그 상사의 목소리만 들려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먼저 눈치를 봤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지나치게 조심하는 태도, 괜히 먼저 기죽은 모습이 일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태도들이 오히려 더 거슬린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혼나는 경험이 적었던 나는 혼남을 ‘수정’이 아니라 ‘부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착하다는 말이 꼭 참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항상 이해해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었다.
착함은 나를 잘 지우고 속마음을 잘 숨겨야 한다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걸 하나 알게 됐다. 사람은 제대로 혼나봐야 자란다는 것이다. 혼나는 경험이 있어야 자신의 경계를 알고,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익힌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착한 아이로만 남아 있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어른이 될 기회를 미뤄왔다.
착함은 약점이 아니라 무기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무기를 나 자신에게도 정직하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걸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모든 상황에서 착할 필요도 없다. 혼나는 날이 있어도 괜찮고, 미움받는 순간이 있어도 그게 나를 부정하는 건 아니라는 걸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착한 편인 사람이다. 하지만 더 이상 ‘착한 아이’로만 남아 있지는 않다. 혼나고, 부딪히고, 마음 상해 보면서 천천히 '착한 아이'에서 '착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