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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동인 Aug 13. 2024

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3화

헝클어진 실타래

우리가 흔히 사랑을 얘기할 때 "아가페"와 "에로스를 논하게 되지만 남성호르몬이 흘러넘치다시피 했던 20살 나의 육체는 "아가페"보다는 "에로스"를 더 원했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20대의 남자들이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내겐 이미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까지 있었으니 그녀와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나의 머릿속은
거센 태풍에 파도가 요동치듯이 온갖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S 양과의 진도가 종착역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많은 여자들은 남자에게 아가페적 사랑을 좀 오래 받다가 에로스로 넘어가기를 원할 것이고
S 양도 그것을 바라는 것 같았지만 성질이 워낙 급했던 나는 순서를 바꾸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에게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있겠는가?
어차피 결혼해서 같이 살 여자인데 순서를 바꾼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 여겼었고
S 양과는 거의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여자와의 정상이 바로 코 앞이었으니 정복하고 싶은 것은 수컷들의 당연한 욕망 아니겠는가.
만약 내가 playboy였다면 비난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그들에겐 여자들은 단지 enjoy 대상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유전적으로 playboy 기질을 전혀 타고나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기에 S 양을 어떤 식으로 만나서 사귀든 그런 것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우리의 만남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지금은 단지 그 과정이었으니까.


쉬는 일요일, S 양을 만나는 날이다. 6일 동안 하루도 쉴 틈 없이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눈꺼풀에 무거운 콘크리트 더미들을 올려놓은 것처럼 하염없이 내려오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학교에서 공부를 했었기에 일요일만큼은 그동안 소진한 체력 보충도 할 겸 하루종일 늦잠을 자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충 씻고 아침도 거른 체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강북구 종암동에서 강서구 방화동으로 달렸다. 버스가 서울 도심지를 벗어나 방화동 근처에 다다르자 차창밖의 풍경은 시골로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방화동은 김포공항 근처였다. 행정구역상 서울이지만 그 시절 방화동은 시골과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늦은 봄 5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푸르고 넓은 논들이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논들 위로 제비들이 먹잇감들을 잡기 위해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그곳을 지나가다 나도 제비처럼 날개가 있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망상에 사로 잡히기도 하였다. 제비들처럼 날개가 있다면  이렇게 먼 길을 차멀미하면서까지 생고생을 하면서 나의 연인을 만나러  필요는 없었겠지.
그렇게 덜컹거리는 버스를 두 시간도 훨씬 넘게 타고 와서 약속장소에 다다르자 S 양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을 보게 되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을 느꼈는데 참 신기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에 찌든 몰골로 버스에서 비몽사몽 하염없이 졸다가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창문에 사정없이 머리를 찧어댔었지만 S 양을 보는 순간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사이를 뚫고 갑자기 쨍하고 해가 내 비치는 듯하였다.

사랑은 때론, 그 어떤 피로회복제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두 어 정류장을 달리다가 우리들이 자주 가는 중국집 앞에서 내렸다.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함이었다. 나라고 왜 멋진 레스토랑에서 고급스러운 음식을 여자와 함께 먹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70년대 말의 방화동은 시골이었기에 그런 레스토랑도 없었거니와 주머니가 얇았던 우리들에게 일부러 도심지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레스토랑 같은 그런 곳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큰 사치에 불과했었다.
부담이 적은 중국집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였고 그곳에서 식사를 마친후에는 인적이 드문 농로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막 사랑이 시작되는 "연인들"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도심을 선호하겠지만 우리처럼 결혼까지 약속한"연인들"은 이렇게 인적이 별로 없는 시골길을 둘이 꼭 붙어서 걷는 것이 훨씬 좋았다. 서로의 체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고 화장을 옅게 한 그녀에게서는 향긋한 내음이 풍겼지만 18살의 풋풋한 피부에서 품어져 나오는 체취는 그 어떤 향수 보다도 더 좋은 느낌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했던 나는 논길을 걷다가 개구리를 잡아서 S 양의 코 앞에 내밀면 그녀는 기겁을 하고서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재밌고 우스웠지만 여자들은 왜 그렇게 개구리를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 내 눈에는 개구리가 아주 귀엽게 생긴 동물에 불과했지만 여자들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개구리의 미끈거리는 피부와 그것에 닿았을 때의 촉감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만나서 특별하게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했기에 말없이 한참을 걸어도 조금의 지루함 조차 느낄 수 없었다.
어떤 연인들을 쉴 새 없이 떠들다가도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감을 느낀다고도 하는데  "도파민"연인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린 이미 "페닐에틸아민" 연인이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말들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농로를 한 참 동안 걷다 보니 평소에 가지 않았던 길이 눈에 뜨였고 그 길로 들어서자 멀지 않은 곳에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 야산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온 아베크족들이 꽤 있었다. 그 들이 왜 등산복도 입지 않은 채 산에서 데이트를 하는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산속 오솔길을 걷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걷느라 피곤해진 다리를 쭉 뻗으며 서로의 어깨를 기대었다. 5월의 짧은 해는 서쪽으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움과 동시에 산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지자 어둠이 밀려오면서
하늘에는 보석 같은 별들이 하나 둘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경쟁하듯이 밤하늘을 뒤덮었다.
산속에 혼자 있을 때의 어둠은 때론 공포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자와 있을 때의 산속 어둠은 또 다른 평안함과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데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은 그 어떤 환경도 모두 극복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산속의 밤은 도심의 밤보다 빨리 찾아오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났었다. 이제껏 우리들은 밝은 낮 동안만 산을 찾았었지만 밤까지 산에 있은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였고 나의 손은 여자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브래지어 속에 숨어있는 젖가슴을 애무했다. 여자의 신체 중에서도 산봉우리처럼 봉긋한 두 개의 젖가슴은 유난히 부드럽고 손 끝에 느껴지는 촉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스펀지와 탄력 있는 고무를 합성시켜 놓은 듯한 그 감촉이 나의 손끝에서 말초신경을 거쳐 뇌에 전달되는 그 순간만큼은 거의 무아지경에 빠지는 듯하였다. 왜 여자와 키스할 때 가슴을 애무하고 싶어 할까. 그것은 여자로부터 엄마의 향수를 느끼기 때문이다. 엄마의 젖꼭지를  물고 빨 때 손으로 젖가슴을 만지면서 평안함을 느끼며 자라서인지는 몰라도 여자와 키스를 하게 되면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내 오른손은 어느새 여자의 젖가슴을 애무하고 있었다. 이제껏

S 양과의 진도는 여기까지였다. 두 사람 다 아무리 피가 끓는 청춘이었지만 그 이상의 진도는 서로에게 부담이 매우 컸기에 항상 거기에서 멈추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완벽하게 책임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육체적 사랑도 마지노선이 있어야 했다.


나는 비록 주민등록상으론 20살 성인이었어도 학생이었기에 우리들 미래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차가운 이성이 우리 두 사람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속의 짙은 어둠은 그런 나의 이성의 힘을 점차  약하게 만들었다. 한 껏 애무를 받은 S 양이 흥분하면서 입에서 신음이 터지자 나는 그만 순간적으로 이성의 끈을 놓게 되었고 달아오른 여자의 몸은 뜨거운 용광로처럼 나의 이성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녹여버렸다. 그렇게 나는 S 양과의 첫 섹스를 어둠으로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산속에서 하게 되었지만 여자와 처음이었던 만큼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허무하게 끝났다. 그때의 기분은 한껏 부풀었던 고무풍선이 마치 바늘에 찔려서 순간적으로 "뻥" 하고 터져버린 듯하였다. 내가 허탈했던 것만큼 S 양도 큰 상실감에 빠졌던 것 같았다.

한 껏 달아올랐던 서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선을 넘고 말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너무도 싱겁게 끝나 버린 여자와의 첫 관계가 대단히 만족스럽지 못했었고 S 양은 나와 결혼할 때까지
지키고 싶었던 순결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상실감에 마음속이 혼란에 빠져있었다.


내가 좀 더 여자의 심리를 알고 있었다면 나는

S 양에게 자신감 있는 제스처로 다독였을 것이고
여자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과 확고한 믿음을 갖게 했어야 마땅했다. 여자는 남자의 그런 자신감과 든든한 마음에 위안을 삼을 것이고 그때부터는 더욱더 남자를 믿고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20살의 어리숙한 청춘은 여자에게 조금 전 나의 행위에 대해 그렇게 확고한 믿음을 주지는 못했다. 밤이 늦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을 내려오면서도 우리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낮에 데이트할 때 말이 없이 손을 잡고 농로를 걸었던 그 상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제부터 선을 넘은 관계가 되었기에 이 상황을 앞으로 어떻게 전도해 나갈지 서로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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