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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Oct 20. 2023

다리의 다리,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다리

1-1. 사람이나 동물의 몸통 아래 붙어 있는 신체의 부분

1-2. 물체 아래쪽에 붙어서 그를 받치거나 직접 땅에 닿지 아니하게 하거나 높이 있도록 버티어 놓은 부분


2-1. 물을 건너거나 또는 한 편의 높은 곳에서 다른 편의 높은 곳으로 건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

2-2.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3. 중간에 거쳐야 할 단계나 과정


교각(橋脚)

다리를 받치는 기둥


당신의 시선을 받습니다.

저 멀리 기차를 타고 가는 당신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저는 제 정체에 대한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기도 전에 저는 당신의 추측으로 말미암아 "다리의 다리"라는 새로운 이름도 얻었네요. 아주 재밌는 이름입니다. 너무 감사해요. 


저는 교각(橋脚)입니다. 

"다리의 다리"라고 불리기엔 제가 한 번도 다리가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교각도 사실 같은 이유로 애매하긴 하죠. 그래도 "다리의 다리"는 음절의 반복이 주는 운율감 때문인지 교각보다는 훨씬 마치 진공상태 같았던 제 존재에 생동감을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그걸 제 이름으로 하고 싶어요. 마을 어르신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지다가 해방 후 한국전쟁이 나면서 다 짓지 못한 채 남겨졌다고 해요. 만들 당시에는 반듯한 돌들을 고르고 골라 차곡차곡 쌓아서 봐줄 만했는데,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모두 뒤집어써서 그런가 어릴 적과 달리 많이 거뭇거뭇해졌어요. 보여드리기가 참 민망하네요. 그래도 가장 보기 흉한 발은 물속에 숨겨져 있어서 다행이에요. 물론 제 발을 지나는 수많은 물과 물고기 그리고 부유하는 어떤 것들과의 만남이 언제나 충돌로만 귀결된다는 게 참 씁쓸하긴 하지만요. 


제가 되지 못한 것, 다리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종(縱)과 횡(橫)의 교차로 완성이 되는 다리는 참 신기하게도 종과 횡의 의미를 동시에 혹은 개별적으로 갖기도 한대요. 그런데 저는 횡을 갖지 못한 종으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하늘로의 평행선으로 남아버렸어요. 무엇을 받치고 있지 않아서 어떤 걸 연결하고 있지도 않네요.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 서서 많은 일들을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저는 무엇이 되지도, 어떤 것을 해보지도 못했어요. 주인공이 되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도 생각보다 그건 제게 큰 욕심이었나 봐요. 저는 당신이 타고 있는 무거운 열차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고 하더라도 좋아요. 그 진동과 하중이 찌릿찌릿하고 위태로우며 무척이나 버겁기도 하겠지만, 열차가 지나가며 저와 다른 교각들을 짓누르는 무게를 함께 견뎌내며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유대감 그리고 당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사명감 혹은 존재감을 느끼며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저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무력감에 빠져있어요. 멋없죠?


아무것도 아닌 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파괴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게 정녕 제 운명일까요? 무위(無爲)에서 비롯되는 그 안락함이 다 무슨 소용인가요. 저는 당신이 부러워요. 당신이 오늘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었거나 일이 너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더라도, 혹은 당신이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 앞에서 웃음을 짓는 연습을 하고 다시 힘을 내서 가족들과 마주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당신의 존재가치는 눈부시게 빛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신이 최선을 다해 살아낸 버거운 오늘이 또 다른 내일의 당신을 살게 할 거예요. 자기 자신을 너무 깎아내리지 마세요. 지금의 당신은 이미 충분한 걸요.


이제 지쳤는지 제 옆에 서있는 다른 교각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열망합니다. 무엇이 되기를. 저도 언젠가 저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다른 교각들과의 평행선 경주를 끝내는 날이 올 거예요. 단 1도만이라도 틀면 돼요. 그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 거예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없이 종말을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게 될 거예요. 만에 하나 제가 결국은 다리가 되지 못하고 작은 돌들로 잘게 잘게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괜찮아요. 그땐 저는 비로소 물속의 작은 생명체들이 머무는 곳이 될 테니까요. 우리 다음에 만날 때는 멋있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요.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사진: Unsplash의 Paulius Drag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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