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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Nov 28. 2023

퇴사하는 너에게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기구하다(崎嶇하다)

1. 산길이 험하다

2. (비유) 세상살이가 순탄하지 못하고 가탈이 많다


기구한 운명이지. 친구야, 

직장 선후배이자 고등학교 친구라니.

결국, 너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고, 네가 마지막 순서야. 

남은 자로서 나는 아직 네게 해줄 일이 남아있어.

너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너에게 축하를 건네기 위해 

나는 너를 만나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 시간에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향하는 건지

겨우 찾은 내 좌석 옆에는 아기와 아기엄마가 힘겨운 여정을 하고 있어.

아기는 울어대고, 아기엄마는 어쩔 줄 몰라하고.

나는 아기엄마에게 연민을 느끼다, 이내 무너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들어버렸지. 


시간을 쪼개서라도 읽으려던 책은 

결국 손에 그러쥐고만 있다가 목적지에 다다른 후에야 포기하고 덮었다.

중간중간 선잠에 깨어 옆자리 사람이 바뀌는 걸, 차창 너머로 앙상한 들판들을 지나는 걸 알 수 있었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길목에서도 해는 여전히 따뜻하더라. 

졸음을 물리치고 서둘러 기차에서 내렸어. 그리고 허겁지겁 꽃다발과 케이크를 사서 네 앞에 섰다. 

2019년 다이어리로 널 맞이했고, 2024년 다이어리로 널 배웅하니 감회가 새롭네.


친구야. 4년 11개월 8일 동안 참 고생 많았어. 

그동안 일하면서 네가 자부심을 느낄 수 없게 했던 모든 일들과 이들을 대신해 용서를 구해.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몸 담았던 직장의 마지막이 초라하게 느꼈다면 그것 역시 미안해.

그래도 오늘 새벽 별을 보며 출근했고, 점심도 먹지 않고 일을 하면서까지 서려고 했던 이 자리야. 

네 마지막을 위해 내가 수많은 당위를 버리고 네 앞에 서있어. 

그만큼 네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굳게 믿었으면 좋겠어. 

케이크에 촛불까지 곁들이니 전혀 초라하지 않지?


울 일도 많다. 왜 이렇게 기쁜 날 눈물을 보이는 건지.

그동안 이곳에서 잘 견뎌줘서 고맙다. 

빈 상자에 너의 짐을 차곡차곡 담고, 

네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네 손으로 치우고,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네 퇴직을 실감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조금 서글퍼하자.

너는 소설 <빠삐용>에 나오는 '빠삐'처럼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다 이내 쟁취해 낸 사람인 거야.

너의 새로운 출발, 남들은 감히 선택하지 못하는 길의 시작점 위의 너에게 축하한다고 외치고 있어.

잠깐의 터널을 지나면 너는 지금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너니까. 잘 될 거고, 잘할 거야.


날이 춥다. 어서 들어가. 나는 걱정 말고. 밤길 운전 조심히 하고. 짐 잘 챙겨서 가고.

또 연락해.


친구야. 이 얘기는 네게 차마 건네지 못한 이야기야.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고, 

이제 마지막 남은 네 자리의 불빛마저 사라지니 칠흑 같은 어둠뿐이야.

네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네 자리는 너의 온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가.

내 마음의 지세(地勢)는 기구해 아마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오래도록 적막할 거야. 

언젠가 내 속마음을 들려주니, 나를 걱정하던 널 보며, 되려 내가 놀라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다.

역시 나는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여야겠다고 다시금 새겼어.

네가 '빠삐' 라면 나는 '드가'가 아닐까? 

나도 언젠가 야자나무껍질로 만든 배를 타고 먼저 떠난 너를 찾아가는 날이 오려나.


사진: Unsplash의 Tom Grünb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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