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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이 내게 남긴 것들

너를 만나기까지 무르익은 시간들

by 미리



시간은 많지만 돈은 없던 시절을 지나, 돈은 많지만 시간이 없는 시절로 왔다. 지금의 나는, 그 부족한 시간을 나름대로 잘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원하는 회사에 취업만 하면 인생이 술술 풀릴 거라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여행도 더 자주 다닐 줄 알았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에 지쳐 갔다. 현실을 바꾸기 전에 내가 먼저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후 독서를 시작했다.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퇴사를 해야 하나 싶던 강박의 시기를 지나, 지금은 독서를 습관처럼 즐긴다. 그리고 일상을 소재로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는, '기록의 쓸모'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행복을 챙길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런 시기에, 한평생 아껴두고 미뤄왔던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이번 여행은 오래 걸린 만큼 특별했으면 했다. '기록이 있는 여행'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여행하며 틈틈이 책을 읽고, 감각적으로 관광하고, 그때그때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감정은 노트에 옮겨 적었다.


왜 굳이 여행까지 가서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과정이 즐겁다고, 이렇게 사는 게 좋은 사람이 돼버렸다고.' 이렇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







유럽 여행이 내게 남긴 것들



01. 기록하는 여행의 기쁨


김신지 작가님의 책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를 읽고, 작은 여행 노트 한 권을 준비해 갔다. 여행하며 틈틈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노트에 두서없이, 글씨체 휘날리며 뭐라도 적었다. 맨 위에는 날짜를 적었다. 그날, 언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꼈는지, 지금 갑자기 든 생각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나로부터 과연 자유로운가' 하는 심오한 물음도 쓰여있다.


기록이라 부르기 거창할 정도의 메모 수준이지만,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미 기록은 완성되었다.'는 사실. 기록하려다 보니 오감으로 느끼면서 여행하고, 순간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기록으로 여기까지 왔다. 기록하려는 순간부터 10편의 글을 발행하기까지, 그렇게 '기록의 힘'으로 여행기를 썼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그 어디에 있든 관찰하고 감상한다. 감각을 곤두세울 것.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중요히 여길 것. 감성적이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 말 것. 좋은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감상할 것. 그리고 감명받을 것. 삶은 아름다운 것이니까. 삶은 기적이니까.

- 《행복은 능동적》 책 내용 中 -
여행 마지막 날, 툭 건들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잎들을 바라보며 여행의 끝자락을 실감했다




02. 같이, 또 혼자 하는 여행의 기쁨


8일간 대형 리무진 버스 한 대만 타고 여기저기 국경을 이동하며 다녔다. 자리가 넉넉해서 매일 좌석에 혼자 앉았다. 틈틈이 책을 읽고, 여행 노트를 꺼내 끄적일 수 있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그렇게 생겨났다. 버스 이동 시간마저 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엄마와 동생과 함께 한 여행이었지만, 호텔 방은 매일 혼자 사용했다. 예약할 때 추가 비용을 내면 1인실을 쓸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오전부터 바쁘게 구경하고 밤에는 조용히 쉴 수 있는, 그 매일의 시간들은 또 하나의 여행이었다. 야금야금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챙기는 재미가 있었다.


함께 한 여행의 기쁨도 물론 있었다. 방방 뛰면서 사진 찍으러 다니는 신난 뒷모습의 동생, 여행 내내 처음 보는 새 옷들을 꺼내 입고는 여기저기서 사진 찍어달라고 하는 엄마. 매일 엄마와 동생의 설렘 가득한 표정을 보는 것도, 같은 하늘 아래 아름다운 동유럽을 함께 볼 수 있는 것도 기쁨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페이지를 꼽아보자면, 잘츠카머구트 마을 호수 부둣가에서 홀로 호수 멍하며 시간을 보낸 순간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여행임을 깨달은 그 혼자만의 시간이 한가롭고 여유로워서 참 좋았다.


마침내 나는, 나의 고독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얼마나 이곳에 도착하고 싶었던가. 나와 함께 고요히 있는 것. 나와 잠깐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면 금방 행복이 차오르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나는 나의 행복에 쉽게 도착하는 어른이 되었다.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참 만나고 싶었지. 이토록 낯선 나를.

- 《무정형의 삶》 책 내용 中 -





03.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여행의 기쁨


첫 유럽으로 동유럽을 선택한 것도, 패키지여행으로 부담 없이 알차게 여행하고 온 것도 모두 만족스럽다. 현지에서 여행하는 그 순간을 즐기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다음 여행을 기약했다. 이토록 모범적인 여행이라면, 어차피 즐거울 거라면, 그다음 여행도 이런 방식으로 해보면 당연히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혼자만의 행복을 챙길 줄 아는 여행, 기록이 있는 여행. 어떻게 여행할지가 정해지니 여행지가 어디든 다 괜찮을 것 같은 자신이 든다. 이왕이면 동서남북 순서대로 여행기를 써보고 싶다. 특히 북유럽은 혼자서 오랫동안 여행하고 싶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부디 오래 걸리지 않길 바란다.


여행 노트의 페이지가 채워질수록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하고 싶은 용기가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든다. 날아든 씨앗이 모두 싹을 틔우진 못하겠지만, 그중 하나라도 새로운 땅에 뿌리내리길 바라며 오늘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꿔 본다.

- 《기록이라는 세계》 책 내용 中 -







첫 유럽 여행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느끼고 왔기 때문인 걸 안다.


막상 여행해 보니 유럽이 특별한 세상 같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특별하게 여행하려 했기에 의미가 있었다. 오래 걸려서 도착한 곳인 만큼 하루하루치의 여행이 제각각 빛나도록 성실하게 보고, 듣고, 느낀 것뿐이었다. 날씨도 도와주는 데 마음껏 즐기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 달 치 월급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그곳을 왜 그토록 미뤄왔을까. 지금의 내가 유럽을 가장 잘 여행할 수 있는 모습일 테니 이토록 오래 걸려야만 했던 게 아닐까. 이번 여행에 의미를 부여한 것도, 기록으로 써 내려가는 것도 나의 선택이었다. 글로 순간을 담아내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여차여차 여행을 마침내 완성시켰다. 이토록 모범적인 여행, 나다웠던 여행, 그리고 앞으로도 나다울 여행 ···



이번 글의 부제는 '너를 만나기까지 무르익은 시간들'로 지었다. 새롭게, 좋아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여행할 수 있기까지 지나온 시간들. 크고 작은 고충들, 그리고 더 나아지려는 노력들. 그런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거창한 삶은 아닐지라도, 여행하듯 살아갈 수 있길.



유럽이라는 나의 오랜 로망은 현실이 되었고, 나는 현실을 소중하게 즐길 줄 아는 법을 배웠다.

로망은 실현시키라고 있는 것이다!






소중한 것을 깨닫는 장소는
언제나 컴퓨터 앞이 아니라,
파란 하늘 아래였다.

-소설가이자 여행작가, 다카시 아유무-




긴 여정의 끝, 저의 첫 연재 브런치북 《가을 하늘 아래, 동유럽》 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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