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나를 만났다

by 마흔로그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은 빡빡한 일상 속에서 누리는 작은 사치다. 네다섯 시쯤, 3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한산하던 열차는 몇 개 역을 지나며 교복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찬다. 젊음의 에너지가 좁은 열차 안을 채운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거나, 영어 단어장을 외우거나, 친구들과 소곤거리며 웃는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치역에서 우르르 내린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원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또 어떤 날은 늦게 끝난 회식으로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밤 10시가 넘어 같은 지하철을 탄다. 늦은 시간이라 고요하던 열차는 대치역에서 문이 열리자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지친 얼굴의 학생들이 열차에 올라탄다. 그들은 여전히 스마트폰을 보거나, 단어장을 외우거나, 친구들과 작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눈다. 기나긴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나는 그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을 본다. 바로 20여 년 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다. 거대한 시스템이 짜놓은 시간표 위를 성실하게 달린다는 점. 그 점에서 우리는 같았다. 입고 있는 옷과 가방에 든 책이 다를 뿐 우리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산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의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라. 자신만의 길을 가라. 그 말을 몰라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저 학생들도, 나도, 아마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실패는 아닐 텐데 왜 마음 한구석은 늘 조급한 걸까.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정답을 찾으려 헤맨다.


나는 늘 다음 단계를 꿈꾸며 현재를 버텼다. 중고등학생 때는 이 지긋지긋한 입시만 끝나면 자유로울 줄 알았다. 대학생 때는 취업만 하면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직장인이 된 지금, 나는 막연히 ‘은퇴 후의 삶’을 그린다. 은퇴를 하면 비로소 나만의 시간을, 나만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 의심스럽다. 지금의 나와 교복 입은 저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은퇴한 나의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 환경이 바뀌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안일한 착각일지 모른다.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머릿속을 비워내려 애쓴다. 내릴 역을 안내하는 방송이 들려올 때까지 아주 잠시라도 모든 것을 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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