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덮친 주말이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스타필드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아이의 웃음소리와 소란스러운 배경음이 뒤섞여 잠시나마 평온했다. 그때 스마트폰 화면에 ‘임대인’이라는 세 글자가 떴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아내에게 짧게 말했다. “집주인 전화.” 아내의 얼굴에 스치는 작은 한숨을 보았다. 아내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혼자 자리를 옮겼다.
2년 전, 지금 사는 집의 전세 계약을 연장할 때의 일이다. 당시 전세 시세가 크게 떨어졌고 임대인께서는 시세에 맞춰 전세금을 대폭 내려주셨다.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팽팽한 요즘, 만나기 힘든 좋은 분이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했고, 우리는 다음번에도 시세에 맞춰 다시 계약하기로 구두 합의를 했다. 지금 걸려온 전화는 최근 다시 오른 시세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색한 안부 인사가 오갔다. 전화기 너머로 임대인께서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먼저 말을 꺼냈다. 시세에 맞춰 다시 계약하길 원하시면 그렇게 하겠다고. 그러자 임대인께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부동산에 시세를 알아보고 적당한 가격으로 다시 연락을 주시겠다고 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용히 넘어가 주기를 바랐지만 역시나 욕심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 내용을 설명했다. 아내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우리는 서점도 가고, 간식도 먹고, 아이와 함께 놀이터도 갔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인상액은 얼마일까. 그 돈을 어디서 마련해야 하나. 이자율이 낮으니 대출을 받을까. 이참에 전세금 핑계로 대출을 더 받아서 투자를 공격적으로 할까. 나는 소중한 주말,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기지 못했다.
이것이 임차인의 숙명이다. 아무리 좋은 집주인을 만나도 나의 주거 안정은 결국 타인의 결정에 달려있다. 나는 이 임차인이라는 신분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 다음 계약 만료일에는 내가 먼저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통보하고 싶다.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나의 장기 계획 위에서 순항 중이다. 수입도, 소비도, 투자도,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나는 잘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해낼 것이다. 나는 반드시 내 집의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