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by 마흔로그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꽉 막힌 도로,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견뎌야 하는 출퇴근. 지겹고 고달픈 회사 업무. 내일은 나아질 거라는 기대 없이 모든 것이 쳇바퀴처럼 느껴지는 그런 날 말이다.


과거에는 버틸 힘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될 날을, 군대에서는 전역할 날을, 취업 준비생 때는 합격 통지를 받을 날을 고대하며 버텼다. 눈앞에 명확한 ‘다음 단계’가 있었다. 하지만 마흔의 직장인에게는 그다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성공적인 창업이나 제2의 인생 같은 희망적인 이야기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들린다. 그저 은퇴하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는 것 같다. 깊은 무력감에 빠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퇴근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의 가면을 쓴다. 일에 찌든 가장의 생색을 있는 대로 낸다. 태블릿을 보고 있는 아이가 오늘따라 꼴 보기 싫다. 거기에 더해 몸에 좋지 않은 과자를 먹고 있다. 평소의 나는 그 모습을 ‘나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이라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오늘, 모든 것이 부정적인 필터를 거쳐 보이는 날에는 그 모습이 그냥 견딜 수 없이 화가 난다.


아이의 나쁜 습관을 방치하는 아내에게도 불만이 생긴다. ‘태블릿 보여주고 우리는 좀 쉬자’고 먼저 제안했던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는다. 나는 괜한 트집을 잡아 나쁜 분위기를 만든다. 결국 아무 잘못도 없는 아내와 아이에게 하루 종일 쌓인 짜증을 쏟아낸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만만하다. 아주 못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온다. 새벽에 혼자 눈을 떠 조용히 출근 준비를 마친다. 오늘은 혼잡한 버스나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은 싫다. 이른 시간에 나와 조금 돌아가더라도 창밖을 볼 수 있는 한산한 버스에 오른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어제의 나를 생각한다. 어제는 그냥,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괜히 나쁜 남편 나쁜 아빠를 만나 고생이 많다.


일기 예보를 확인하니 오늘 저녁부터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나는 다짐한다. 오늘은 무조건 일찍 퇴근해야겠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아내와 아이가 모두 좋아하는 음식을 배달시켜야겠다. 따뜻한 저녁을 함께 먹으며 어제의 못난 내 모습을 사과해야겠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아주 작은 후회와 반성으로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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