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주말 낮이었다. 아내가 아이를 봐주는 덕분에 오랜만에 나 혼자만의 외출에 나섰다. 사고 싶은 러닝용품이 있어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매장으로 향했다. 하늘이 조금 흐렸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버스에서 내리기 두 정거장 전, 갑자기 차창 밖으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장대비로 변했다. “우산 챙길걸.”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기분 좋게 시작한 외출을 망쳤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급히 근처 건물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다.
비를 맞으며 매장까지 뛰어갈까, 아니면 금방 그칠 것 같으니 기다릴까, 잠시 고민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바로 옆에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중고 서점’. 나는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점 특유의 차분한 종이 향과 고요함이 나를 반겼다.
나는 무심코 책들을 훑어보다가 한 에세이 책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보다 10년쯤 앞서 대기업 직원으로서 비슷한 길을 걸었던 한 작가의 책이었다. 지금은 대기업을 퇴사하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린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다행히 책이 두껍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고민에 깊이 공감했고, 그의 용기에 감탄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빗줄기가 멎어 있었다.
서점을 나와 원래의 목적지로 걸으며, 나는 두 가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첫째, 내 책 읽는 속도가 제법 빨라졌다. 물론 책이 얇고 쉽게 읽히는 에세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한 시간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어낸 것은 꾸준한 독서가 만든 기분 좋은 변화였다.
둘째, 인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다. 비가 와서 짜증이 났지만 그 비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서점에 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좋은 책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운이라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행운을 가져다준 셈이다.
흐뭇한 기분으로 러닝용품 매장에 들어선 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계획에 없던 비싼 러닝 벨트와 물통 두 개를 사버렸다. 예산보다 훨씬 큰 지출이었다. 갑작스러운 비가 나에게 좋은 책을 선물했지만 내 지갑은 조금 얇아졌다. 돈을 쓴 만큼 더 열심히 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