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질러

ㅡ고민중독자의 변

by 지얼


1. 뷰리단의 당나귀


눈앞에 두 가지의 건초 더미를 둔 당나귀는 어느 건초 더미를 선택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굶어 죽는다. 이를 일러 '뷰리단의 당나귀 효과'라고 한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서 그 어떤 결과도 없는 삶보다는 선택해서 실패한 삶이 차라리 낫다.


아주 오래전에, 한 친구가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며(부러운 자식...)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건 한정된 돈으로 냉장고를 먼저 사느냐, 세탁기를 먼저 사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야. 이것도 저것도 선택할 수 없는 일종의 딜레마인 것이야."

그러나 인간인 그는 당나귀로 남지는 않았다.


간혹 당나귀가 될 뻔한 순간이 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그렇다. 예컨대 신께서 임하시어 선택장애를 일으키는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신 : 외로우냐?
나 : 외로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신 : 그러냐? 할 수 없잖냐. 네 나이에는.

나 : 젊어지고 싶습니다.

신 : 그래? 그럼 너를 26세로 돌려놓아주마.

뿅~

나 : 흑흑... 감사합니다...

신 : 좋아하기에는 이르다. 내가 네 배필이 될 처자를 인연 지어주마.

나 : 헉? 정말요?
신 : 믿음이 약한 자여. 신이 구라 치는 것 봤냐?
나 : 아닙니다...
신 : 3초의 시간을 주겠다. 자, 그럼 다음의 처자들 중에서 한 명만 선택해라.

1) 장원영
2) 카리나
3) 설윤


아, 아, 아직은

준비가 안됐나 봐요

소용돌이 쳐 어지럽다구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속이 왈칵 뒤집히고


3,

2,

1.

땡.


이후 나는 독야청청... 아니, 독수공방으로 차츰 시들어 가다가 밥숟갈을 놓게 된다. 사인은 대바늘 과다 사용으로 인한 패혈증.

선택장애는 실상 선택불가와도 같고 고민중독은 습관성 회피로 귀결된다.


이럴 수는 없잖아...


모 기타 사이트에서 누군가 다음의 글을 남겼다.

-기타 케이스를 사려고 합니다. 어떤 색이 좋을까요?

여러 사람들이 댓글을 남겼다.

-노란색 사세요. 강추.

-파란색이 좋습니다. 정말 예뻐요.

-초록색이 무난하지 않을까요?

나는 다음의 댓글을 달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너 꼴리는 대로 사세요


나는 (이상한 말이지만) 뷔페식당을 좋아하면서도 또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을 먼저, 무엇을 많이 먹지?' 하는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을 하게 되는 거다.

이것도 일종의 '고민중독'일까? 그래서 딱 한번 미친 짓을 한 적이 있다.

뷔페식당에서 메밀국수만 먹음으로써 고민중독자가 아님을 입증한 거다.

이런 행동에 대해 나의 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상한 놈...




2. '할까 말까'의 기로에서


다음은 소설가 프랭크 오코너의 일화다.

어느 날, 오코너는 친구들과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과수원의 높은 담이 그들을 막고 있었다. 그들의 여행이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그들은 모자를 벗어 담 너머로 던졌다. 모자를 찾기 위해서라도 담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나는 고인 물이 되어 버린 기타 말고 드럼을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 나이에 무슨...' 하는 생각이 나를 막고 있었다. 나의 도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날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나는 핸드폰을 들고 드럼 구매를 위한 계좌이체를 해버렸다. 본전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제 드럼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할까 말까 하는 순간에 '하지 뭐...' 하며 미덥잖게 선택을 하는 때가 있다. '하지 뭐...'는 말 그대로 하겠다는 표현이겠지만 실상 한쪽 발은 '안 할래'에 걸쳐져 있는 상태랄까.

선택 장애, 혹은 고민 중독의 순간.

내가 누군가를 믿는 게 어렵듯이 때로는 나도 나를 못 믿는다. '~해야지'라는 다짐 후에 행함이 없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때문에'라는 변명이 뒤따라왔던가.

그럴 때는,

일단 지르고 본다.


일단 지르고 나면 다른 쪽에 걸쳐져 있는 한쪽 발의 힘이 약화된다.

물론 지른다고(결정한다고)해서 무조건 다 성공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젊은 시절에 어떤 여자에게 사심이 담긴 편지를 건낼까 말까 고민한 적이 있다. 결국 고민 중독 상태가 되기 전에 결단을 내려 편지를 건냈고, 며칠 후 나는 밤에 이불킥을 했다.

이런 걸 보면 '일단 질러'가 능사는 아닌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만약 그때 내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때 편지를 보냈다면 잘 될 수도 있었을 테고 그 후로 뜨ㅂ.....' 하며 (사실상 망상인) 미련과 회한으로 오랫동안 안타까워했을지도 모른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을 흘리게 될 수도 있다. 누구 말마따나 사람은 해 본 일보다는 안 해 본 일로 더 후회를 하는 법이니까.

진실의 이불킥은 잠깐이지만, 착각일지라도 그걸 알지 못하는 한 미련과 회한은 오래간다. 그러니까 불법 행위가 아닌 한,


일단 질러


그러면 최소한 밥숟갈 놓기 직전에 '아, 그때 내가 드럼을 쳤더라면 쵸단처럼 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망상의 회한으로 생을 마감하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ㅡ누가복음 9장 62절

쵸단


사족 :

<뉴스 공장>의 김어준이 젊은 시절에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매장에서 본 수트를 보고 살까 말까 망설였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통장 잔고의 부족함에 망설였지만 결국엔 오늘을 산다는 결심으로 지르고 말았다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삶의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당장 행복해져야 된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해요. 지금은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어도 지금은 그 일을 하지 않고 열심히 뭔가를 모으거나 준비하거나 미뤄두거나 해서 나중에 행복해질 거야. 행복이란 게 마치 적금을 들 수 있고 나중에 인출해 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때의 행복은 그 순간에 영원히 사라지는 거예요. 그날로 돌아가서 그때 행복을 찾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당장 행복해지셔야 하는 거죠."


"정리하면 자기가 언제 행복한지, 내 욕망이 뭔지 생각하고 대면해야 돼요.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돼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하고 싶은지 찾았으면 그 일을 그냥 해요.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실패도 하고 작은 성공도 있겠죠. 그렇지만 지금 당장 시작해야 되는 겁니다. 행복이란 게 저축하거나 적금 들었다가 나중에 꺼내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 지금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걸 유보해 두냐고. 미쳤어? 그러면(지금 행하면) 그게 잘 사는 겁니다."


"잘 사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 거죠. 훌륭한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 아니고."




https://youtu.be/QonXUELzeRw?si=3-llvkl6u9vQWmcc

QWER, <고민중독>


아, 아, 아직은

준비가 안됐다구요

소용돌이 쳐 어지럽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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