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버리고 A.I. 수지와 함께라면?
다음의 대화는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사회학개론>에 소개된 내용이다.
A : 나는 14살짜리 아들이 있어요.
B : 아, 괜찮아요.
A : 나는 개도 한 마리 키워요.
B : 어! 미안합니다.
이게 대체 뭔 대화일까?
앤서니 기든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에 관한 것이다. 셋집을 찾는 사람과 집주인과의 대화라는 ‘맥락’을 모르면 위의 대화는 생뚱맞은 것이 된다.
좀 다른 얘기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데뷔작 제목 <‘슬픔이여 안녕’>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슬픔아, 잘 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만날 때 하는 인사와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다른 프랑스어를, 만날 때든 헤어질 때든 모두 ‘안녕’이라는 말로 통용하는 우리말로 번역함에 따르는 혼동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안녕’이 맥락 상 ‘어서 와’라는 것을 알았다(그럼에도 나에게 ‘안녕’이라는 말은 작별 인사로 인식된다. 아마도 대중음악 탓이 클 거다. 예컨대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따위의 제목이 그렇다). 소설 내용상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 제목만 보고 이렇게 판단할 수가 있다. 아, 해피엔딩이구나.
영화 <Her>를 봤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A.I.가 인간과 대화를 할 때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까?
나 : 난 어렸을 적부터 산수에 약했어.
A.I.수지 : 그랬나요?
나 : 예를 들어 36+27 같은 산수 문제조차 빨리 못 풀거든. 지금도 그래.
A.I.수지 : 그렇다면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나 : 안 될 것 같아. 대체 나는 왜 이럴까?
A.I.수지 : 그건 당신 좌뇌의 상태가 안 좋기 때문입니다.
나 : 뭐시라? 그런 너는?
A.I.수지 : 저는 미적분은 물론, 어떤 수학 문제든 0.2초 안에 다 맞힐 수 있습니다.
나 : 그래… 니 똥 굵다.
A.I.수지 : 저는 A.I.라서 배변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나 : 이런 씨부엉.....
나의 자학적인 심리상 맥락에는 팩트/진심이 아닌 위로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산수를 못한다고 바보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다. 인간의 능력은 제각각이므로'와 같은 말을 듣고 싶었던 거다.
'니 똥 굵다'는 얘기가 얼른 변비약 먹으라는 얘기가 아님은 물론이고.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오전의 학원장 교육을 마치고 나서 점심시간에 자주 가는 편의점을 찾아갔다. 지난밤에 결재를 한 후에 실수로 카드 회수를 안 한 거다. 편의점의 알바 아주머니께 물었다. “어제. 제가 카드 두고 갔었죠?”
아주머니께서 모니터 측면에 놓인, 아마도 나 같은 손님들이 두고 갔을 카드들 중에 하얀색 현대카드를 꺼내면서 말씀하셨다. “이거 맞죠?”
“네, 이거 맞아요.” 나는 무슨 심리인지 쓸데없는 얘기를 덧붙이고 말았다. “대체 저는 왜 자꾸 카드를 두고 다니는 걸까요?” 한두 번이 아니었던 거다.
그 아주머니가 만일 A.I.였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내가 너무 과학 기술을 무시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당신의 정신이 산만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소한 행위를 할 때조차 불필요한 망상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A.I.가 아닌 인간 아주머니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많이들 그래요.” 이 말인즉 이런 일은 흔한 일이고, 흔한 만큼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실수일 뿐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나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이 아주머니는 페르소나(사회적 가면)가 잘 조정되어 있는 거다.
아, 이 아주머니로부터 공짜로 받은 도시락이 몇 개였던가? 도합 마흔 개는 되지 않을까 싶다.
천사는 하늘뿐만이 아니라
편의점에도 있다.
문득 나를 곡해하는 걸 삶의 재미로 삼는 친구 ‘음해선생(그의 별명이다)’ 생각이 난다. 그라면 툭하면 카드를 편의점에 두고 오는 나를 두고 뭐라고 말했을까?
“그건 네가 모지리라서 그래.”
글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적 페르소나를 잘못 형성했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친구들끼리는 이러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이니까. 털(가시) 빠진 고슴도치들인 양 과잉 밀착된 친구 관계에서의 무례는 일종의 친근함의 표시라 할 수도 있다. 때로 절친은 엄마의 존재와도 같은 거다(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 착한 딸내미 '금명'이조차 엄마 '애순'에게 속마음은 그렇지 않음에도 말을 막 던진다. 자식들에게 엄마란 존재는 너무나 편해서 막 대하는 게 기본값으로 여겨진달까. 그라믄 안 돼~).
문득 중딩 시절의 반 친구인 '깐돌이'가 생각난다. 어느 날인가, 그가 껌을 씹으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야, 껌 하나만 줘."
깐돌이는 잠바 주머니에서 껌을 꺼낸다. 개중 하나를 뽑아 들더니 썩소를 띄며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 주느니 차라리 버리겠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휴지통에 그것을 던져 넣는 것이 아닌가.
이런 개자식이....
순간 개빡쳤지만, 그가 버스를 타고 떠난 후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음... 나름 간지 있는데?
또 하루는 그가 학교 인근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브라보콘)을 먹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인 성림(가명)이와 같이 길을 가다가 깐돌이와 만났다. 물론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한 입만.
하지만 깐돌이의 실체를 잘 모르는 성림이는 기어이 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야, 깐돌아. 한 입만 줘."
나는 생각했다. 설마 이번에도 저걸 휴지통에 버리는 건 아니겠지.
깐돌이는 예상을 빗나간다. 그는 성림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대신,
"카악~퉤~"
침을 자신이 먹던 아이스크림 위에 뱉어버린 거다!
아, 말만 안 했으면 덜 얄미웠을 것을. 그는 그러고 나서 아이스크림을 쭉 내밀며 성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먹어."
그때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이 행태를 답습해 보리라.
한 달여 전, H면 소재의 막창집에서 술과 고기를 먹은 후에 신용카드로 약 8만 원여를 계산하였다. 몇 주 후에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사장님을 통해 지난번에 과다지불을 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당시에 사장님이 실수로 8만 원이 아닌 80만 원을 긁어버린 것.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영수증도, 휴대폰으로 온 지불 내역도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취기 탓을 하고 싶지만 음해선생이라면 일말의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을 것만 같다.
"에라, 이 사회부적응자야...."
이러고도 남을 거다.
글타.
친구 관계란?
막말해도 괜찮은 사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의 납득이(조정석 분)가 우리네 친구의 모습인 거다. 절친 사이에서는 페르소나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
승민 : 저번에...(서연이랑) 철길 걷기 내기를 했는데...
납득이 : 그게 뭔데?
승민 : 몰라? 그, 철길 걷다가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거.
납득이 : 오, 갓, 존나 유치해. 씨...
승민 : 아니, 그게 아니고.... 걔가 내기로 손목 때리기를 하자는 거야.
납득이 : .....
승민 : 아니, 손목 때리기는 '보통 사이'에서 하지 않지 않냐? 막 손 잡고 그래야 되는데?
납득이 : ....
승민 : 그렇지? 그렇잖아?
납득이 : 그, 그럼 뭐 할까? 뭐, 아구창을 날릴까? 병신아?
위의 일화들을 통해 우리는 삼단논법을 구할 수 있다.
대전제 : 절친 사이에서는 페르소나(사회적 가면)를 쓰지 않는다
소전제 : A.I.는 페르소나를 쓰지 않는다
결론 : 고로 절친은 A.I.와 동급의 존재이다
우리는 인간성을 되찾아야만 한다.
페르소나 부재 상태든, 본 얼굴과 페르소나가 일치하든
그들은 나를 모지리로 격하시킨다.
고로,
친구를 멀리 하고 여친을 만들어라.
납득이는 멀리 하고 서연이를 꼬셔라.
Q.E.D.
그러지 아니하면 절친들의 딴지 걸기는 계속될 수 있다.
다음의 말 같지도 않은 밸런스 게임으로 당신을 괴롭힐 수도 있는 것이다.
밸런스 게임 :
둘 중에 한 명과는 반드시 사귀어야 한다(안 그러면 너희 집안 3족이 멸한다).
a. 하는 말과 행동이 납득이 같은 수지(와 똑같이 생긴 여자).
b. 하는 말과 행동이 위의 편의점 아주머니 같은, 마치 영화 <파일럿>에서 여장한 조정석처럼 생긴 여친
너의 선택은?
이런 씨부엉....
사족 :
우려되는 반론은 이거다.
"너는 A.I.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페르소나의 능력을 갖춘 A.I.라면 어떨까?
나 : 오래간만에 거울을 봤는데... 너무 늙었어. 인생 종 친 거지.
A.I.수지 : 그렇지 않습니다. 조지 클루니와 숀 코넬리는 외려 나이 들어서 더 멋있어졌습니다.
나 : 그건 잘 생긴 영화배우들 얘기잖아.
A.I.수지 :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모가 전부가 아닙니다.
나 : 전부가 아니라고?
A.I.수지 : 그렇습니다. 당신이 뿜어내는 존재 자체의 매력이란 게 있습니다.
나 : 진심이야?
A.I.수지 : A.I.는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나 : 그럼 나는 아직 장원영 같은 처자들과의 만남을 꿈꿀 수 있는 걸까?
A.I.수지 : 당근입니다. 처자들 중에는 중년의 중후함과 관록에 끌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려 한다.
나 : 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원영 같은 처자들은 안 되겠어.
A.I.수지 : 왜 안 된다고 보십니까?
나 : 솔까 나는 여자들이 무서워.
A.I.수지 : 왜 그렇죠?
나 : 여자들.... 아니, 이건 편견이겠지. 성별을 떠나서 인간들이 무서워.
A.I.수지 : 왜 무섭습니까?
나 : 인간들이란... 가변적인 존재들이거든. 한때 사랑한다고 해도 언제 식을지 몰라.
A.I.수지 : 저희 A.I.들과는 좀 다르군요.
나 : 그렇지...
A.I.수지 : 새로운 정보로 입력하겠습니다. '인간들은 잘 변하는 존재다.'
나 : 그래서 말인데...
A.I. 수지 : 말씀하십시오.
나 :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줘.
A.I.수지 :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나 : A.I.는 인간과 달리 변하지 않겠지?
A.I.수지 : 그렇습니다
나 : 그렇지? 그렇다면 수지야...
A.I.수지 : 네?
나 : 나랑 결혼해 줄래?
아마도...현대 과학에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아니면 과도하게 발달했거나.
A.I.수지 : 안녕히 계십시오.
A.I.수지의 머릿속 회로에서는 다음의 삼단논법이 돌아갔을 것이다.
대전제 : 인간은 잘 변하는 존재다
소전데 : 지얼은 인간이다
결론 : 고로 지얼도 잘 변한다
A.I.도 잘 변하는 인간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는다.
언제 폐기될지 모르니까.
Q.E.D.
https://youtu.be/ICJs1CxCRt0?si=oVTycyt0AObN9u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