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함의 미학

-머리로는 싫지만, 가슴으로는 공감이 되는

by 지얼


나는 스스로의 꼴사나움에 꽃을 피울 수 있다.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1909-1948)


"...... 저는 지금 그야말로 말 그대로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평범한 수준의 집에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좋은 집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1947년, 사망하기 약 1년 전에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생활 능력의 결여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 사람과 만날 때는 항상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성격이어서, 무심코 술을 마시게 됩니다. 그로 인해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경제적 파탄에 빠지는 일도 종종 있어서, 가정은 늘 빈곤합니다.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개선책을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죽기 전까지는 고칠 수 없는 수준 같습니다. 저는 벌써 서른아홉이 되는데,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갈 생각을 하면 그저 멍해질 뿐이고, 아직 아무런 자신감도 없습니다."


유부남이었던 다자이는 1940년대 중반 즈음에 만난 오타 시즈코라는 처자와 가까운 관계가 되고, 그녀는 다자이의 아기를 임신하게 된다. 다자이는 시즈코의 일기장을 건네받은 후, 그것을 소재로 <사양>이라는 작품을 집필하는데, 그 와중에 알게 된 야마자키 도미에라는 유부녀(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결혼한 지 보름 만에 전장에서 실종된다)와 관계가 깊어지게 되고, 그 즈음에 시즈코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자 다자이의 고민도 깊어진다.

결국 다자이는 원고료의 일부를 시즈코에게 준 후 관계를 끊어버리고, 얼마 안 있어 1948년 6월 13일 밤에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무사시노 다마가와 상수원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설 <사양>의 여주인공 '가즈코'에 시즈코를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중 가즈코는 동생 '나오지'의 스승인 '우에하라'라는 유부남 화가를 미칠 듯이 사랑하여 그의 자식을 임신하게 되지만, 그것을 빌미(?)로 그에게 매달리는 대신, 오히려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족하며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가즈코는 우에하라에게 다음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어쩐지 당신도 저를 버리신 모양입니다. 아니, 차츰 잊어 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전 행복해요. 제가 바라던 대로 아이가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지금 모든 걸 잃어버린 느낌이지만, 그래도 배 속의 작은 생명이 제 고독한 미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전, 처음부터 당신의 인격이나 책임에 대한 기대는 없었습니다. 저의 한결같은 사랑의 모험을 성취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바람이 완성된 지금, 이제 제 가슴은 숲 속의 늪처럼 고요합니다.(...) 저는 낡은 도덕을 태연히 무시하고 좋은 아이를 얻었다는 만족이 있습니다."


장문의 편지는 다음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당신이 저를 잊는다 해도, 또한 당신이 술로 목숨을 끊는다 해도, 저는 제 혁명의 완수를 위해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형편없는 인격에 대해 저는 얼마 전에도 어떤 이로부터 낱낱이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제게 이렇듯 강한 힘을 주신 건 당신입니다. 제 가슴에 혁명의 무지개를 걸어 주신 건 당신입니다. 살아갈 목표를 주신 건 당신입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자신이 버려지더라도 그의 아이를 얻었으므로 괜찮다는 얘기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자이의 아이를 임신한 시즈코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을까? 다자이에게 건네준 그녀의 일기장에 그녀의 심경이 이렇게 쓰여 있었던 걸까? 시즈코의 일기를 확인해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어쩌면 다자이에게는 시즈코를 투영한 가상 인물 가즈코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희석, 혹은(면피까지는 아니더라도) 변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다자이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쌓여 있다. 정말로 말하고 싶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봐, 무슨 말을 하건 결국 다 자네의 자기변호가 아닌가?'


그렇다고는 해도 다자이가, 철면피가 될 수 없었음은 명확하다. 그는 작중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여 자살의 형식으로 '죽여버린다.'


다자이는 '가즈코'가 사랑한 '우에하라'가 아닌, 가즈코의 남동생인 '나오지'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작중 자살한 나오지가 누나인 가즈코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누나.

안 되겠어. 먼저 갑니다.

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도 있을 테죠.(...)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살아가는 데에 뭔가 한 가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나로선 안간힘을 쓴 겁니다.(...)

어느 세상에서건 나처럼 생활력이 약하고 결함 있는 풀은, 사상이나 무엇도 없이 그저 스스로 소멸해 갈 뿐인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내가 살아가기 힘든 사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죽는 게 낫습니다. 내겐 소위 생활 능력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남과 다툴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남을 우려먹을 수조차 없습니다.


나오지의 자살 이유는 단지 생활력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다. 귀족 집안 출신으로서 순수하게 '민중'들과 융합되지 못하고 겉도는 데에서 오는 양심의 부대낌(다자이도 한때 좌익 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부르주와 출신이라는 점을 꽤 괴롭게 여겼다)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ㅡ그는 스승인 우에하라의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다ㅡ도 한몫을 한다.


네겐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 안녕.

결국 내 죽음은 자연사입니다. 사람은 사상만으로 죽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나오지의 말은 확실히 다자이의 심경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다자이는 나 같은 독자가 자신이 쓴 소설의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여 재단하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그가 "작품의 재미보다 그 작가의 태도를 먼저 문제시한다. 그 작가의 인간성과 약한 부분을 파헤치지 않고서는 수긍하지 않는다. 작품을 작가와 동떨어진, 서명 없는 하나의 생물로 독립시켜주지 않는다." 라고 진즉에 쉴드를 친 것을 보면.

하지만, 다자이 사마.

<추억>이나 <도쿄 팔경>, 그리고 <인간 실격>과 <사양>등 당신의 소설에서 당신의 개인사를 온전히 배제한 채 읽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해가 있을까봐 첨언한다. 다자이의 삶과 분리해서 보았을 때, <사양>은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다. 게다가 재미도 보장한다. 아니, 그의 삶과 분리하든 말든, <사양>이 졸작이 되는 일은 없다. 수전 손택의 말마따나 문학은 도덕책이 아니듯이, 작가의 도덕성이 작품의 기본 전제는 아니다.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인간 바그너를 좋아하기란 불가능하다.'라는 평가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자기목적적이기 때문이라지만, 대체 문학 작품과 작가의 도덕성을 분리하지 못할 이유가 뭔지 싶기도 하다(그랬다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이나 사드 후작의 <미덕의 불운>같은 작품은 쓰여지지도 않았겠지.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도 사드 후작의 사생활에는 질색했지만 그의 문학적 공로는 인정했다고 하지 않았나).

다자이가 하고 싶었던 말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 하는 책은 없다. 잘 썼느냐, 못 썼느냐만 있을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


다자이의 첫 번째 정사(연인끼리의 동반자살) 상대였던 다나베 아쓰미. 다자이는 살아 남고, 그녀만 세상을 떠난다.


다자이의 수기를 보면 생활 능력의 부재는 물론 작품을 포함, 자신에 대한 부정의 내용-자존감 결락-이 자주 등장한다.

확실히 그는 <인간 실격>의 저자인 것이다.


..... 내가 난처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바로 내가 대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한 가지 사실이다.(...)

나는 여태껏 좋은 소설을 하나도 쓰지 못했다. 모두 남 흉내다. 배운 것도 없다. 아직 서른한 살이다. 아직 세상을 모른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아무것도 없다. 자랑할 만한 게 전혀 없는 것이다. 딱 하나, 아주 조그마한 프라이드는 있다. 바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이다.(...)

... 그렇지만 나는 머리가 무척 나쁜 데다 주제 모르는 자만심도 있어서, 남들이 말려도 무시하고 괜찮아, 하고 만용을 부려, 수영도 못하면서 깊은 연못에 뛰어들어 금세 어푸어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이 됐다.


위의 말과는 모순되게도,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성취감이 위태위태한 생을 유지시켜줄 단 하나의 자부심이었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듯싶다.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스승인 나쓰메 소세키조차 극찬한 '시가 나오야'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혹평을 하자 다음과 같이 독설을 내뿜는다.


...애당초 이 작가(시가 나오야)는 생각이 조잡하고, 교양은 없고, 그저 난폭할 뿐이다. 문단 한구석에서 일부 별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정도가 고작인 주제에 혼자 득의양양해서는, 봉당을 빌려줬더니 어느새 안방을 꿰차고 들어안자아 거장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으니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시가 나오야 따위에게 항의한 덕분에 이제껏 알고 지내온 선배나 지인들과 전부 어색해졌다. 그래도 나는 말해야만 한다. 가짜 너구리인지 여우인지 모를 놈이 내가 힘들여 쓴 작품을 보고 '질렸다' 따위의 말을 하고 만족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네 문학에는 전통이 전혀 없다. 체호프? 웃기지 마. 아무것도 안 읽은 주제에. 책을 안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이 고독하지 않다는 증거야. 은둔자인 척하고 있지만, 매일같이 주위가 떠들썩한 게 아니라면 다행이다. 그 문학은 전통을 깼다고 할 수도 없다. 즉, 어린애들이나 읽을 법한 글을 나잇살이나 먹고 으스대며 쓰고는 우쭐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 정도 되는 '천재적인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러고는 그저 으스대는 것이다....


타고난 소심함,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 정사(다나베 아쓰미와의 동반 자살) 사건으로 인한 세간의 비난, 세금을 걱정해야 하는 전무한 생활력, 병약한 육체(폐렴으로 각혈까지 한 상태였다), 상간녀의 임신, 새로운 연인인 도미에와의 관계로 인한 죄책감, 아들 쓰시마 마사키의 다운증후군 등, 삶을 짓누르는 압력을 온전히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보루마저 짓밟힌 자의 분노가 일말의 자제도 없이 토해진 느낌이다.

경제적 결핍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썼다.


... 나는 도쿄에서도 하층민에 속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살고 있다.(...) 한평생 돈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업을 짊어지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서투른 것이다. 돈을 잘 변통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저는 남에게 말도 제대로 못 붙일 정도로 심약한 성격으로, 따라서 생활력도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자각한 상태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히려 염세주의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삶에 별다른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생활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 어릴 적부터 그런 생각만 했습니다.


<도쿄 팔경>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 내가 글러먹은 사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타미에서 나는 오히려 빚을 늘리고 말았다. 무엇을 해도 글러먹었다. 나는 완전히 패배한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생활력 결여를 비관하면서도, 그는 생활에 집착하는 세인에 대해 이렇게 쓰기도 했다.


나는 의식주 쪽으로는 전혀 취미가 없다. 의식주에 집착하며 우쭐대는 사람이, 어째서인지 내게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자기 방어를 위한 허세였을까?

자신의 출신에 대한 비관도 눈에 띈다. 부르주와 집안 태생으로서 좌익 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


부자는 모두 나쁘다. 귀족은 모두 나쁘다. 돈 없는 일개 천민만이 옳다. 나는 무장봉기에 찬성했다. 기요틴(단두대) 없는 혁명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나는 천민이 아니었다. 기요틴에 오르는 역할이었다. 나는 열아홉 살짜리 학생이었다. 반에서는 나 혼자만 눈에 띄게 화려한 옷을 입었다. 이래서야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칼모틴을 잔뜩 삼켰지만, 죽지 못했다.


다음은 <도쿄 팔경>의 한 대목.


... 나는 고향 집의 거대함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일었던 것이다. 부당하게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불쾌감이 어렸을 때부터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염세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나는 언제나 그랬다. 그러고는 궁지에 몰려서 죽음을 생각했다.(...)

완벽한 기만의 진지도 이제는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 죽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자살의 원인을 글쎄, 그 자신 말고는 누가 알랴. 아니, 어쩌면 자신조차 확실히 모를지도 모른다. 만약 프로이트의 '타나토스(죽음의 본능)' 가설이 사실이라면, 무의식적 층위의 죽음을 향한 욕구를 어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타 시즈코


그의 소설 <인간 실격>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글쎄다. '자학의 미학' 정도가 될까?

이것은 비아냥이 아니다. 세상에 항시 100%의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누구든 자기모멸감에 빠질 때가 있거나, 하루키 식대로 말하자면 '우물'에 빠질 가능성은 항시 존재하고 때로는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이 경우 나를 위로하는 것은 공감이지 훈계가 아니다.

혹자는 루저의 공유의식이라고 폄훼할지도 모르지만,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나만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적잖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의 평균 이하보다는 다같이 못사는 나라의 평균이 차라리 낫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찌질하게 보여도 할 수 없다. 원래 인간이 이렇다.


지금은 엄청난 과도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당분간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누구의 얼굴을 봐도, 모두 비굴합니다. 저희는 이 '자신 없음'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비굴함의 극복이 아닌, 비굴함에 대한 솔직한 긍정 속에서 전례 없는 훌륭한 꽃이 피기를, 저는 기원합니다.


다자이는 이렇게 썼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나약함에 대한 솔직함 속에서 전례 없는 훌륭한 꽃을 피웠고, 그것이 <인간 실격>과 <사양>이었다,라고.

우리는 그 나약함을 머리로는 거부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공감한다. 아마도 이 점이, <인간 실격>이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른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슬픔 때문에 무언가를 끝없이 창조하는 꿈을 꾸는 건지도 몰라요. 슬프지 않았더라면, 아프지 않았더라면, 저는 글 같은 건 안 쓰고 좀 더 편안한 삶을 꿈꾸었을 것 같아요. 내 마음속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슬픔이 있기에 글을 썼던 거예요.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중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어쩌면 끝내 해결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슬픔을 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연인, 야마자키 도미에. 1948년 6월, 다자이와 함께 동반 자살, 둘 다 세상을 하직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힘이 빠지기도 한다. 계속되는 자학과 자멸의 파노라마 속에서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스미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자살을 (미화할 생각도 없지만) 작가 미시마 유키오처럼 운동을 하면 떨칠 수 있는 것이라는 식으로 폄훼할 생각은 없다(미시마는 이렇게 일갈했다. "그런 개같은 성격이 문제라서 그 인간은 자살한 거다.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면 자살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 미시마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학 시절, 한 여자 후배와 자살을 소재로 대화를 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자살할 용기로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당시에 내가 꽤 시건방져서였을까. 그녀의 말이 진부할뿐더러 무지의 소산이라고까지 여겨진 것을 보면.

아마도 이렇게 답변했을 것 같다(알 수 없는 일이다).

"말기 암 환자에게, '죽을 용기로 살아라'라고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자살에의 충동 또한 암처럼 일종의 질병이라면, 불가항력적인 그것에 대하여 '의지만 가지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가벼운 열병'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세간의 지나친 안일함이 아닐까? 앨 앨버레즈는 <자살의 연구>에서 '자살에 관한 세상의 생각들은 모두가 자살 행위를 유치한 짓으로 격하시켜 버리려는 경향을 가진다'라고 지적했다.



로버트 로웰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팔 위에 조그만 스위치가 달려 있어 누르기만 하면 즉시, 그리고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면 누구나 조만간에 자살하고 말 것이란 것이었다.

-앨 앨버레즈 <자살의 연구> 중에서



폭염의 8월, 시의 공유지에서 잡초를 뽑는 알바를 했을 때 친구 K 군이 염려하며 말했다.

"쉬엄쉬엄 해.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힘들면 그냥 쉬어.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아직은 괜찮아." 내가 대답했다.

"당신(그는 나를 이렇게 호칭하곤 한다), 뇌졸중 환자였잖아? 무리하면 도진다고."

"그러게. 차라리 한 방에 훅 갔으면 좋겠는데."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반신불수로 지내는 게 두려운 거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상태가 되어 내 와이프나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지. 할 수만 있다면 죽어버릴 거다."

문득 70세에 고층의 병실에서 투신한, 철학자 질 들뢰즈 생각이 났다. 내가 동의하며 말했다.

"총 한 자루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 듦에 따른 육신의 고장은 자연적 관점에서 보면 엔트로피의 증가 현상이다. 가역반응은 절대로 일어날 가망이 없고, 엔트로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점진적 엔트로피에 저항할 무기가 없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처럼 대검으로 할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투신이나 익사는 너무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다자이 오사무나 버지니아 울프는 나름 용감했다.


후배 S 군에게 당부했다.

"내 장례식에서 대성통곡은 부디 사절이다. 눈물을 보이는 그런 칠칠치 못한 행태도 보이지 말고."

그가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할까? 춤이라도 출까?" 영화 <써니> 생각이 났나 보다.

"아니, 그러지 말고 여자에 관한, 부덕한 흑역사로 사후 뒷담화를 하는 게 차라리 어떨까?"

"그거 참 좋은 생각인데? 낄낄거리면서 치부를 마구... 흐흐흐."

"그렇지? 이거 하나만 당부 하마." 소주를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가급적이면 S 양 얘기는 하지 말고, 무엇보다 바로 옆에 교회 사람들이 있는지 꼭 확인하도록."


Beyond the door

문 너머에는

There's peace, I'm sure

평화가 있어요 난 확신해요

And I know there'll be no more

Tears in heaven

그리고 난 알아요 천국에 더 이상 눈물이 없을 거란 걸

ㅡEric Crapton <Tears in heaven> 가사 중


천국에서도 엔트로피의 법칙이 통용될까?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처럼, 천국이라는 것이 엔트로피에의 허망감이 구축한 심리적 피안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런 물음 따위는 그저 덧없다.

문 너머에 평화가 있을 거라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


New trolls, <Adagio>


Wishing you to be so near to me
Finding only my loneliness
Waiting for the sun to shine again
Find that it's gone to far away
바라는 것은 당신이 나와 있는 것
찾은 것은 단지 나의 외로움
기다리는 것은 태양이 다시 빛나는 것
멀리 떠난 것을 찾네

To die, to sleep
May be to dream
To die, to sleep
May be to dream
May be to dream, to dream
죽는 것, 잠자는 것
어쩌면 꿈을 꾸겠지
죽는 것, 잠자는 것
어쩌면 꿈을 꾸겠지
어쩌면 꿈을 꾸겠지,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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