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찾아서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었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 헤매는 꿈이다.
꿈속에서,
나는 어떤 건물 안에 있다. 대략 4,5층에 있었던 것 같다.
삼색이 고양이(검은색, 갈색, 흰색의 세 가지 색의 털을 지닌 고양이. 대개 암컷이라고 한다) 한 마리가 내게 다가온다. 내가 키우고 있는.... 아니, 집사인 내가 모시고 있는 고양이 '지니(별칭은 '에옹이')'인가 싶어 자세히 봤더니, 아니다, 다른 고양이다.
당황한 나는 지니와 또 한 마리의 고양이, '몽냥이'의 행방에 대해서 걱정한다.
'얘네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엘리베이터 안이다.
엘리베이터는 아래를 향해 내려가더니 어느 순간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의 공간은 어느새 지하철 실내로 변모되어 있다. 나는 당황한다. 고양이들이 있을 그 건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라의 상태인지라 돈을 넣을 지갑이나 호주머니도 없었으리라.
이어서 급작스러운 장면 전환(어쩌면 기억이 끊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거리에 있다. 지상이다(언제 지하철에서 내려 이곳까지 도달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고양이들이 있는 건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다시 타야만 한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다.
10m 남짓 떨어진 곳에 가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곳은 지하철 티켓을 파는 곳이다(왜 이런 곳에서 판매를? 알 수 없다).
가판대 뒤편으로 두 명의 사람이 서 있다. 한 명은 젊은 여자고 또 한 명은 젊은 남자다. 남자의 팔뚝 가득히 새겨진 문신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사정 얘기를 한다.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데 티켓을 살 돈이 없다, 나중에 어떻게든 지불할 테니 일단 표를 달라,라고.
그들은 거절한다.
어떤 시비가 붙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나와 그 문신남은 싸우기 시작한다. 어느덧 나는 바닥에 쓰러진 문신남 위에 올라타 있고, 그에게 주먹세례를 퍼붓는다.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된다.
(또다시 장면 전환)
고양이들이 있는 건물 안에 있다. 고양이를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전에 경찰이 찾아올 것 같아 불안하다. 감옥에 있을 상상을 하자 불안감이 증폭된다.
꿈에서 깨었다.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의 지향점은 소위 '개성화(Indivisuation)'다. 이것은 온전한('완전한'이 아닌), 인격의 통합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그림자'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어두고 사악한 측면이다. 융에 의하면, 이 그림자를 억압해서는 개성화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합해야 할 무의식이다. 융 심리학을 한마디로만 정의하자면 아마 이것이 될 것이다.
대극의 통합
이를 잘 묘사한 소설이 아마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리라. 이 작품에서 초기의 에밀 싱클레어는 '선의 세계'를 지향하는 존재를 대변하고 (반면에) 일진 크루머는 '악의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로, 그리고 막스 데미안은 선과 악을 통합한, 개성화를 이룬 존재로 설정된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전하는, 구약성경의 '아벨과 카인'에 관한 해석은 선악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다소 충격적이다(기독교인들이라면 헤세의 데미안을, <오멘>이라는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데미안과 동격으로 볼 지도 모르겠다). 데미안은 아벨을 죽인 카인이 '용기와 개성을 지닌(...) 뛰어난 녀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인자 카인을 두려워하는 약자들이 보복을 위해 창세기의 아벨과 카인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서 붙였다고 생각한다. '정당하게 해석되어 있다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문득 니체의 '르상티망' 개념이 떠오른다).
".... 따라서 강자가 약자를 때려죽인 것에 불과하단 말야. 아마도 그것은 영웅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러나 하여간 다른 약자들은 이제 겁을 잔뜩 집어먹게 되었단 말야. 그들은 몹시 한탄했지. 그러나 누가 그들에게 '왜 너희는 간단히 놈을 해치우지 않는가?'라고 물을 것 같으면, 그들은 '우리가 비겁한 자들이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지. '할 수가 없단 말야. 그놈은 표지를 달고 있으니. 신이 놈에게 표지를 달아 주셨거든!' 대략 이렇게 해서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날조되었을 거야.(...)"
소설 말미에서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 :
"데미안!" 하고 나는 불렀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었군, 싱클레어!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있었어?"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지. 이렇게 마주친 건 오늘 저녁이 처음이지만 말이야. 저녁 내내 우리를 뒤쫓아왔지?"
"그럼, 난 줄 금방 알아차렸군."
"물론이지, 넌 확실히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표지를 달고 있으니까."
"표지라니? 무슨 표지?"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옛날 우리는 그것을 카인의 표지라 불렀지. 그것은 우리의 표지야. 너는 언제나 그것을 지니고 있었거든. 그래서 친구가 된 거고.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더 뚜렷해졌는걸."
"나는 몰랐어. 아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언젠가 네 초상을 그린 적이 있었어, 데미안. 그런데 나는 그것이 나와도 닮았다는 데 놀랐거든. 그것이 바로 표지였을까?"
정신 분석가 로버트 존슨은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에서 이렇게 썼다.
... 그것은 우리 문화가 무시하고 있는 끔찍한 진리로서, 사람이 평상심을 유지하려면 시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쪽에 드러나는 특질을 선호한다면 그 반대쪽에도 동일한 무게를 지니는 뭔가로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시소의 가능한 한 많은 성인의 자질이나 선을 쌓으려 한다. 그리고 성인의 자질을 갖춘 사람을 마치 선만 있는 사람처럼 묘사한다. 이는 시소의 바른쪽으로 모든 걸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런 상태는 대단히 불안정하다.(...)
... 자신한테 자기의 어두운 면을 숨기려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진정 성인의 자질을 갖추려면 시소의 중앙에서 한쪽의 무게와 비슷한 무게를 반대쪽에도 쌓아야 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소유한다는 말은 자기 안에 아주 다양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로버트 존슨이 "우리는 파괴 없는 창조를 바라지만 그것은 가능한 바람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아마도 그것은 <데미안>을 통해 헤세가 하고픈 말과 동일한 의미이리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지킬 박사가 자아라면, 하이드 씨는 억압된 그림자일 것이다.
분석심리학자 이부영 교수는 억압된 그림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 측면이다.(...)
그림자의 의식화 작업을 통하여 인간은 신과 같이 완결무결한 존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원만성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자기의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는 나머지 그것을 누르고 마치 그것이 없는 듯이 선의 얼굴로 행동하여, 그래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격체처럼 행동하여 '그림자 없는 사람' 임을 자처하거나 지향한다면 그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신경증적 해리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다.
한신대 신학과의 김재성 교수는 이렇게 썼다.
개신교는 신자들의 죄의식을 고도로 강화시키지만 그것을 해결해 줄 장치는 갖고 있지 않다. 개신교 신자는 고해성사 같은 사면이나 속죄를 위한 성사를 갖고 있지 않으며, 혼자서 자기 죄를 짊어져야 하고, 늘 자신의 양심을 날카롭게 할 수 있도록 긴장을 지속시켜야 한다.
이러한 긴장은 사람들 속에서 무의식을 억압하게 하고 그림자가 짙어지게 한다.(...) 이 그림자를 의식하는 정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짙어지게 된다. 신경증은 언제나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런 환자가 치유를 받으려면 의식된 인격과 그림자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림자를 단순히 억제하는 것은, 두통을 없앤다고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
-<성서와 개성화> 중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도 설핏 이해될 것 같다.
"나라는 놈은 원래가 이렇게 되어 먹었어요. 내 속에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하지요.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면 이놈이 나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추지요. 그러면 숨통이 좀 뚫립니다."
"당신 속에도 나처럼 악마가 한 마리 있지만 아직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두목, 어서 그놈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름을 지어주세요. 그럼 아마 지내기가 좀 나아질 테니까요."
내가 꾼 꿈을 분석하기 전에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마련해 놓자.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다.
융 심리학에 관해 박식한 것도 아니다(쬐끔 안다).
'해석'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따라서 아래의 해몽은 그저 이현령비현령 정도로 치부해도 어쩔 수 없다.
분석 심리학에 의한 해석 :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아닌 다른 삼색이 고양이가 다가온 이유는 뭘까? 음.... 추측컨대 나 자신은 그동안 그림자를 잘 통합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것은 위악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아님 말고)
-찾지 못하는 고양이 '지니'와 '몽냥이'는 통합하지 못한 그림자를 상징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 지하철 공간은 아마도 무의식을 상징하는 것일 테다. 반라의 상태는 도덕적 벌거벗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건물로 돌아가기 위한 돈이 없다는 것은 그림자와의 통합을 위한 수단, 혹은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하철 티켓을 파는 자판은 왜 지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걸까?(이건 좀 어렵다...) 어쩌면 그림자를 통합할 수단은, 지상이 상징하는 '의식'에서 찾아야 한다는ㅡ의식적이어야 한다는ㅡ의미가 아닐까?
-문신남과의 싸움은 그림자를 통합하는 행위 그 자체일까, 아니면 소위 '그림자 투사'의 일면을 상징하는 것일까? 자판대의 두 명의 남녀가 대극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자(선)와 싸우지 않고 남자(악)와 싸웠다는 것은 시소의 불균형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렵다...
-다시 건물 안에 있게 되었을 때 경찰과 감옥의 두려움을 상기한 것은 두려움이나 거부감에 따른, 그림자 통합에의 의식적 저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님 말고)
-
사족 :
어쩌면 에드거 앨런 포우의 단편 소설 <검은 고양이>도 융 심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그림자의 억압, 혹은 은폐에 관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과도한 음주로 정신이 피폐해진 주인공이 자신이 기르던 검은 고양이를, 자신이 살해한 아내의 시신과 함께 지하실 벽 속에 유기한 것은 어쩌면 그림자의 은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뭐,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