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다리

-이별

by 지얼


책장 구석에서 오래전에 사용했던 노트를 발견했다.

(이것은 뭘까? 젊은 날의, 오글거림의 기록인가?)

당시 컴퓨터가 없지 않았음에도 구태여 수기로 쓴 것을 보면, 나도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옥.jpg 다자이 오사무 형님이 공감하실 것 같긴 하다....


(지구는 다른 별에서 바라본 지옥이라는 투의,) 젊은이답게(?) 염세적인 내용의 25년 전 글도 있고, 자본주의 세상에서 도태되기 싫었는지 경제학 관련 공부를 한 흔적(개발새발의 요약)도 있다. 물론 지금 그 내용은 다 잊혔다.

반려견 '토루(말라뮤트 종)'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난 후에 쓴 글도 보인다. '지구는 지옥'이라는 투의 중2병적 염세주의에는 그저 '비관할 줄도 알고, 짜식, 아직 젊었구나' 하는 소감이 들지만, 이 글은 좀 짠하다.



토루2.jpg


옮겨 적어본다.


-우리 토루는 6년을 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오늘은 토루가 떠난 지 딱 일 년이 된 날이다.

처음 데리고 올 때 토루는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되었다.

눈이 조금 내리던 어느 날, 행여 감기에 걸릴까 봐 민소매 점퍼 속에 넣어서 데리고 욌다.

북방견이라 추위 따위는 상관없을 테지만 그래도 아가였으니까.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던 토루도 암이라는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커다랗던 토루는, 지금은 조그만 단지 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졌다.

하얀 가루가 되어서.


그 커다란 몸집의 토루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주인을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픈 곳도 없애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나 않았을까.

아픔을 없애줄 수 있는 건 주인이 아니라

오로지 죽음뿐이라는 것을 전무지전불능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젠 아프지 않으니까.... 괜찮아.

이게 아직 죽지 않은 자의 유일한 위로다.

내세를 바라는 건 불안한 실존의 거짓 위안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실증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에 네가 있다면 이 거친 삶은 그나마 견딜만할 텐데.


사람과의 이별보다 반려동물과의 이별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가끔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사람과의 이별에는 심리적 철벽이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탓일까?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 할아버지의 죽음은 슬프지만 파트라슈의 죽음은 더 슬프다.


1970년대 영화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ㅡ병든 연인(혹은 와이프)을 두고 오두막 집을 나온 주인공은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배회하다가 돌아온 후, 오토바이 위에서 오두막을 바라보면서 한 방울의 눈물도 없이 나지막이 말한다. "지금쯤 죽었을 거야."

이것은 물론 회피라는 형식의 억제된 슬픔을 묘사한 것이겠지만, 나는 외견상이나마 눈물 없이 담담한 표현이 맘에 든다. 사람에 대한 냉혈인간, 아니 냉누인간인지도 모른다.



문득 <산울림>의 <독백> 가사 일부분이 떠오른다.


나 혼자 눈감는 건 두렵지 않으나

헤어짐,

헤어짐이 서러워


이제는 헤어짐이란, 바삭 마른 나뭇가지에 스쳐 지나가는 서늘바람으로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소위 낙목한풍(落木寒風)이 아닌 것이다(문자 좀 써봤다).

지구의 자전에 슬퍼하지 않듯이, 회자정리라는 일종의 자연법칙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수지(내게는 여성 대명사)와의 이별에 관한 것이고,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여전히 삭풍처럼 서글프다.

나 자신의 사후에 대해서는 '영원한 깊은 잠'으로 생각하지만 반려동물의 사후에 대해서는 '무지개다리'를 상상하는 이율배반은 어쩔 수 없다.

이것 또한 설령 방어기제라 할지라도.


에옹이.JPG




몇 달 전에, 마흔 살이 머지않은 어떤 처자에게 이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난다.

"여자의 경우, 세월이 가면 관심이 줄어드는 데 반해 대체 왜 개나 고양이에겐 한결같을까요?"

(상실감의 지속 시간도 수지(여성 대명사)보다는 반려견이 더 길다.)

이렇게 얘기한 이상, 플러팅을 시도했다면....

.... 아마도 단칼에 까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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