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에서 사랑 난다
"한 번, 섬광처럼 반짝이지만 그대로 끝이 나고 연극의 암전처럼 곡은 닫히지."
-이혁진, <사랑의 이해> 중에서
드라마 <사랑의 이해> 원작 소설.
'이해'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理解와 利害.
이해(利害)관계로서의 사랑은 이제 선택이 아닌 당위가 되었다. 아무리 법륜스님께서 그러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계산이라고 일침 하셨더라도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성선택은 본시 생존과 번영을 위한 이해관계의 문제일 뿐.
다만 요즘에는 남자들에게도 버거운 세상이라 "와이프 스펙이 인생 스펙되는 세상"으로 진화(?)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과학도라면 문학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혀놓은 사랑을 발가벗기면서 '이게 다 유전자 놀음'하며 냉소의 똥침을 갈길지도.
본 소설의 한 줄 평은 다음과 같다.
곳간에서 사랑 난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그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질 않습니다
드라마로 2회까지 봤을 때는 어장관리녀에게 된통 당하는 호구남의 얘기인 줄 알았다. 어떻게 각색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는 그런 저차원적인 얘기 대신 어쩔 수 없는 현실로서의 '곳간의 이해'에 대해 다소 처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상호 이득, 혹은 상호 교환을 전제한 관계가 당연한 현실. 진정한 사랑은 유전자에 각인된 진화심리학적 유인(誘因)을 초월하는 것이겠지만, 유전자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한 우리들에게는 아마도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일 터.
그러니 최소한 유사-사랑을 바울의 그것과 혼동하지는 않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결론 :
그러니 1+1의 박리다매로 내놓아도 시장가치가 떨어지는 삶을 지향하자. 선택받을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는, 유전자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랑했지만 사랑을 믿지는 않았다.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만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종현이나 상수에게서 구하려고 했을 뿐 자신에게서 구하려고도, 차라리 깨끗이 체념해 버리지도 않았다.
-이혁진, <사랑의 이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