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처럼 남은 첫사랑의 그림자
"그리고 눈앞으로 날아든 한 장의 부음,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내 잃어버린 사랑.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고 그 사랑은 파도치듯 밀려오는 망각의 세월 속에서도 조금도 그 빛이 바래지 않았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의 <해설> 부분에 쓰여있는 이 문장으로 영화 <45년 후(원제 45 years)>를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스포일러 주의)
결혼한 지 45년이 다 되어갈 무렵, 케이트의 남편인 제프에게 옛 연인의 부음이 날아든다. 그 이후 케이트는 남편이 예전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는 걸 목격하고, 다락방 깊숙이에서 남편의 옛 연인이 찍힌 슬라이드 필름을 발견한다.
20년도 더 지난 어느 날인가, 친구 영철이(가명)의 사진 앨범을 통해 그와 그의 옛 연인이 긴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들을 보고 난 후 다음의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가갈 때 이 사진들 다 불태워 버릴 거지?"
"미쳤냐?"
"그러다가 네 (미래의) 와이프가 이걸 발견하면 어쩌려고?"
"할 수 없지. 어차피 지나간 일이잖아."
"만약 네 (미래의) 와이프가 이것들을 깡그리 태워버린다면?"
"그때는 이혼해야지."
오해는 말자. 그는 본심과는 상관없이 재미를 위해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혼한다'는 얘기는 아마도 대화의 흥미를 위한 과장이었을 것이다.
그걸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그때 어렴풋이 그의 앞날을 예감했을는지도 모른다. 독신 생활을 아주 오랫동안 유지하게 되든가, 혹은 결혼을 하게 되어도 그 결말이 그리 밝을 수만은..... 다행히도 그는 독신으로 남았다.
하지만 어쩔 것이랴. 무모하지만 악의는 없을, 통제 불가능의 이 맹목적인 그리움을. 내 품에 없는 것에 대해 더 가열하게 되는 욕망인 것을.
케이트가 묻는다. "(만약에) 그녀가 안 죽고 같이 이탈리아에 갔다면... 그 여자랑 실제로 결혼했을 거야?" 융통성이 없는 제프가 대답한다.
"서로 결혼했을 거야."
언젠가 승연이(가명)가 내게 물었다.
"오빠, 나 이뻐?"
내가 말했다.
"수지를 1톤 트럭에 가득 실어서 준다고 해도 너랑 안 바꿔."
'준다고 해도'라니.... 여자가 물건인가. 여하튼, 나는 이것을 일러 '아름다운 거짓말'이라고 한다. 관계라는 것은 이런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유지가 되는 것이다.
승연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나의 '이름다운 거짓말'을 하는 능력에도 녹이 슬었다고 가정해 본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또 한 번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오빠."
"응?"
"아직도 나 사랑해?"
"아마도."
"칫, 아마도가 뭐야. 벌써 내가 질렸어?"
"그럴 리가."
대답이 짧다는 점에 유의하자. 승연이는 계속 문제를 던진다.
"아직도 나를 한 트럭 가득 태운 수지와 안 바꿀 거야?"
잠시 생각한 후 가장 진솔한 대답을 내놓는다.
"승연아. 내가 너랑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바로 수지 같은 여자랑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쓸데없는 진솔함은 관계를 망치고, 당신으로 하여금 '혼밥러'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이끈다.
그러니 이런 대화는 상상으로만 하자. 특히 그녀와의 이별 후에.
결혼에 이르지 못한 미련과 집착이 유발한 염증ㅡ이른바 '자이가르닉 효과'ㅡ에 대해 나름의 소염제로서 기능할지도 모르니.
'꿩 대신 닭'이 되어버린 케이트와, 역시나 '꿩 대신 닭'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세상의 모든 와이프에게 있어서 어쩌면 어느 소설(혹은 영화)의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일지도 모르겠다.
<씨네 21>의 한 평론가는 한 줄 평으로 이렇게 요약했다.
"결혼이라는 길고 고요한 서스펜스에 대해서."
★★★★☆
오래간만에 <Smoke gets in your eyes>가 듣고 싶어진다.
They asked me how I knew
My true love was true
사람들이 내게 물었어
내 진짜 사랑이 진실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I of course replied
Something here inside cannot be denied
난 당연히 답했지
내 안에 있는 뭔가가 부정할 수 없다고
No
They said someday you'll find
All who love are blind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어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눈이 멀었다고
When your heart's on fire
You must realize
Smoke gets in your eyes, in your eyes
네 마음이 불타오를 때
깨달아야 해
눈에 연기가 들어온다는 걸, 눈에
So I chaffed them and I gaily laughed
To think they could doubt my love
그래서 난 내 사랑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농담을 던지고 웃어버렸지
Yet today my love has flown away
I am without my love
하지만 오늘 내 사랑은 떠나버렸고
나는 사랑 없이 남았어
And now laughing friends deride
Tears I can not hide
이제 친구들은 웃으면서
나의 숨길 수 없는 눈물을 조롱하지
So I smile and say
When a lovely flame dies
Smoke gets in your eyes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말하지
아름다운 불꽃이 꺼질 때
눈에 연기가 들어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