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ytonality Music

-고통의 효용

by 지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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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조성 음악이란?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게 쉬울 것 같다. 예컨대 주선율은 다장조인데 반주는 한 음 위인 라장조로 동시에 연주하는 식이다(이 경우라면 복조성 음악이 정확한 명칭이 된다). 다조, 예를 들어 세 개의 조성을 섞을 수도 있다. 상성은 다장조, 내성은 사장조, 하성은 라장조 뭐 이런 식으로.

웬만큼 새로운 자극에 마음이 열려있지 않은 이상 대체로 듣기에 괴롭다. 요리로 말하자면 세 가지의 이질적인 재료를 섞어놓은 것만 같다. 과장하자면 생크림 케이크 위에 콩나물과 초밥을 얹어먹는 꼴이랄까.


아래 동영상의 곡, 미요의 <Saudades do Brasil 中 Corcovado>는 그나마 듣기 편하다(?). 아마도 주선율은 D장조로, 반주는 G장조로 하여ㅡ 말하자면 근접조를 이용해서 부딪힘이 덜 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주선율이 F#단조로 바뀌는 부분은 역시나 골 때리게(?) 들리기는 하지만.

'(비교적) 듣기 편한 다조성(복조성) 음악'은 한번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벤자민 브리튼의 <The ash grove(물푸레나무 숲)>라는, 제목만큼이나 아름다운 곡 역시 복조성을 사용한 음악이다. 아래 동영상에서 1분 14초 지점부터 들어보라. 거기서부터는 성악과 피아노가 아주 살짝 어긋나는 듯하더니 1분 29초 지점부터는 대놓고 따로 논다. 각기 다른 조성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피아노 연주자보다 저 소프라노 가수가 더 대단해 보인다. 피아노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꿋꿋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약간의 성량 감소는 어쩌면 '피아노 소리를 듣지 말자, 들려도 휩쓸리지 말자…'하는 의지가 조금은 흔들린 결과가 아닐까?



뜬금없이 떠오르는 추잡한 옛일.

길을 가다가 노점 포장마차에서 뭔가를 먹고 있는 한 여자 선배님을 발견한다.


나 : 앗, 뭐 먹고 있어요?

여자선배 : 나? 떡볶이.

나 : 와, 맛있겠다. 나 한 입만 줘요.

여자선배 : 싫은데? 아, 맛있다. 냠냠.

나 : 안 주면 그거 못 먹게 할 거예요.

여자선배 : 그래? 어떻게 할 건데?

나 : 입맛을 떨어지게 하겠어요.

여자선배 : 재밌겠네. 해 봐.

나 : 후회하지 마요.

여자선배 : 해보라니까. 아, 냠냠, 맛있다.

나 : 대변에 낀 콩나물.

여자선배 : 몰라. 못 들었어. 냠냠, 쩝쩝...

나 : 세면대에 묻은 가래.

여자선배 : 음, 이 매콤한 맛. 냠냠, 쩝접...

나 : 차바퀴에 깔려 내장이 터진 쥐새끼.

여자선배 : 응? 뭐라고? 음... 너무 맛있어. 냠냠...

나 : 에잇! 그러지 말고 한 입만 줘요!

여자선배 : (그릇을 건네주며) 알았어. 자, 여기.

나 : 진작에 그럴 것이지.

여자선배 : 근데 이 국물 색깔, 꼭 장떡 먹고 토한 것 같지 않니?


자극적인 외부 대상을 결코 머리속으로 표상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실천함으로써 미각을 유지했던 (국물만 남긴 게 그 증거다) 거다. 정신일도하사불성의 경지다.

후배 H군도 본의 아니게 이를 체현한 바 있다. 파헬벨의 <카논>을 연주했을 때다.

이 곡은 클래식 기타 4중주로도 편곡되었는데, 언젠가 동아리 후배 네 명이서 모 후배의 결혼식 축가로 연주한 적이 있다. 한참 잘 나가다가 H 군이 그만 예술적 삽질(?)을 하고 만다. 실수로 무려 네 마디 분량을 기타의 한 프렛 아래에서 연주해 버리고 만 거다!

다시 말해 다른 이들이 모두 마장조로 연주하고 있을 때 저 혼자서 내림마장조로 연주한 꼴이랄까.


보통은 한 프렛을 내려서 연주하게 되면 다른 이들의 연주와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 청각적 위화감을 얼른 깨닫게 되기 때문에 연주를 멈추게 된다. 그런데 H 군은 배 째라는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그렇게 네 마디를 간다. 대단한 뚝심이다.

바로크 음악과 현대음악의 결합, 다조성의 Canon 탄생! 우연(실수)이 빚어낸 복조성의 미학. H군은 진정 아방가르드한 청력의 소유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에게 다른 이들이 내는 소리는 자신의 감각에서 외면된 '세면기에 묻은 가래'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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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은 마냥 생소하기만 한 음악은 아닐 것이다. 일찍이 (호러나 스릴러) 영화를 통해 현대음악들을 접할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니. 심지어는 음악에 무지한 학교 선생님을 통해 현대음악을 접하기도 한다. 초등학생 때 행했던 돌림노래를 생각해 보자. 음악에 대한 선생님의 무지로 인해 돌림노래를 해서는 안 되는 노래에까지 이것을 시도함으로써 각 마디의 화성과 어긋나는 아주 난잡한 현대음악(?)이 초등학생 교실 안에서 탄생되지 않았었나.

화성 구조를 해체하는 그 전위성에의 쾌감이라니!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번 교내 합창 대회의 참가곡은 <등대지기>로 정하기로 했어요. 자, 내가 '하나 둘 셋' 하고 센 후에 모두 다 같이 노래를 불러 보아요. 자, 하나~둘~셋~."

결과는 혼돈의 카오스고 무질서의 아노미다. 극단적 다조성 음악의 구축이랄까.


왜일까? '조성'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음악치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첫 음의 음정을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수는 다장조로 노래하고, 영희는 바장조로 노래하고, 영철이와 복희는 각각 라장조와 사장조로 노래하는 꼴이다. 복조성(複調性)을 넘어선, 진정한 다조성(多調性) 음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기준이 되는 'A(라)음=440Hz'에서 벗어난 미분음의 조성까지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현대음악이 또 있을까?

이런 현상을 목도하면 왠지 침팬지가 그렸다는 그림이 떠오른다. 변태적 공감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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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조성 음악의 발생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추측하여 본다(부디 너무 진지하게 듣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음악가가 지인의 노래를 피아노로 반주해 준다. 그런데 음치인 이 지인은 피아노 반주의 조성과는 다른 조성으로 노래를 부른다. 이 음악가는 순간 당황하지만, 문득 이러한 부조화에 나름의 미학이 있음을 간파한다.

하여 이 음악가는 이러한 조성의 불일치에 좀 더 세밀한 쾌감이 있음을 간파한다. 그는 부르르~떨며 생각한다. '오… 뭐지? 이 부조화의 조화는…? 거슬리는 듯하면서도 어쩌다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발생하는 협화의 짧은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청량감―위화감과 이질감이 해소되는 듯한 이 청량감은 너무나 상쾌하구나. 오… 엑스터시!

이 심미안('심미耳'라고 해야 맞겠지만…)은 계속 진화한다.


예컨대 아래의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 영상에서, 3분 19초 지점부터 나오는 불협성은 청각적 불편함이 수반된다. 그러다가 3분 44초 지점에서 협화음과 조우하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양 청량감을 느끼게 된다. 불협화라는 불쾌한 자극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협화의 쾌감이 부각된다고나 할까. 불협화의 자극이 불쾌하면 불쾌할수록 협화의 청량감은 심화된다. 음악적 불협성의 존재에 대한 당위는 다음의 글을 통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반복된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특정 곡의 화음아 어떻게 진행되는지(예컨대 C코드 이후에 F코드가 나올지 Am 코드가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전제에서 아래의 글을 보자.


...특정한 화음을 들으면 앞으로 그 화음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알게 되고, 화음이 그대로 진행되는 한 우리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잘못된 조성 변화는 귀에 거슬리다 못해 고통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불협화음은 화음의 (편안한) 진행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키는 시기를 늦춤으로써 그동안 충족되지 않은 예상이 모여 큰 구조를 이루게 한 후 이를 통해 더 큰 감정을 전달한다.

-로베르 주르뎅,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중에서


하지만 이 '잘 다듬어진 불협화음(예컨대 C-->C#dim7-->Dm 같은 코드 진행)'도 반복되어 익숙해지면 더이상 '기대 만족의 지연 효과에 따른 쾌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뜬금 없지만, 문득 하라 히데노리의 만화 <겨울 이야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 '히카루'가 짝사랑하는 '시오리'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한 선배에게도 구애를 받는 중이다. 시오리도 그 선배를 좋아해서 그가 다니는 동경대를 진학의 목표로 하고 있지만, 열심히 동침을 강요하는 그가 부담스럽다. 결국 그 선배는 시오리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이 선배라는 놈은 왜 그랬을까? 기대 만족의 지연 효과에 따른 긴장감, 또는 설렘이 어느 기간 동안은 유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나자 그는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권유가 불발되었을 때 그는 그 가능성을 폐기하고 이별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 기대 만족의 지연 효과를 너무 오랫동안 지속시키면, 성취의 기대에 대한 쾌감은 점차 옅어져 가고 종국에는 기대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아마도 재수생이 4수생보다는 학업에의 의욕이 더 가열차지 않을까?


음악의 (기대 만족을 지연시키는) 큰 구조는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큰 고통을 줄 수도 있다. 지나치게 의욕이 넘치는 유능한 작곡가가 강한 예상을 유발시킨 뒤 이를 충족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큰 괴로움을 경험한다. 이런 음악은 곧 공연장에서 그 모습을 감추게 된다.

-로베르 주르뎅,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중에서


그러니까 시오리를 걷어차 버린 그 동경대 선배를 너무 미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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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음악의 3분 19초 지점부터 발생하는 불협화음을 '잘 다듬어진 불협화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일반적인 청취의 수준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반복 학습의 영향으로 '잘 다듬어진 불협화음'에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그것이 협화음으로 해소되는 순간의 기쁨(또는 쾌감)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이들에게는 협화음으로의 귀환에 더 큰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지지 않아서 더 불쾌한 불협화음'ㅡ 청각 자극이 요구될 것이다.

사실상 다조성 음악이라는 것도 이러한 감각의 진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류이치 사카모토, <Bibo no aozora>


'편안함'의 유의어는 뭘까? 물론 '평안'이나 '안온' 따위 들일 게다. 사전적 의미에서는 그렇다. 인간의 리얼 세상에서 '편안'의 유의어는 '평안' 따위가 아니라 바로 '권태'다.

다시 말해, 권태란 유통기한이 지난 평안이다.

평온/안락이 지속되면 인간은 슬슬 지겨워하기 시작하고 권태에 빠질 조짐을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자극을 찾는다(음악에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예컨대 집을 떠나 야생을 영위하여 개고생을 자초한다든지, 영하 30도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벼랑에 매달리는 위험을 감수한다든지… 그리고서 반 거지 꼴로 집에 돌아와서는 소파에 벌러덩 자빠져 누우면서 이렇게 말한다.

"역시 집이 최고!"


이 자극마저도 너무 자주 경험하여 일상사로 격하되면, 보다 심도 있는 자극을 찾아 나선다. 이것을 극한까지 경험하면, 인간은 '편안'의 반대인 '불편/고통'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식으로 피학의 변태가 되어 가는 건 아닐까? 문득 중국의 와신상담 고사와 중세 유럽의 채찍질 고행자 플래질런트가 떠오른다.


너희들, 그거 솔직히 즐기고 있지?


이런 건 비유하자면, 협화음으로 머잖아 해소되지 않는 불협화음의 장시간 지속과도 같다.

인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이유가 고통이 해소될 때의 대비적 쾌감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뛰어넘어 중증의 변태적 단계에 이르게 되면 고통 자체에서 쾌감을 얻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건 아닐까?

백수 생활 3개월이면 어느덧 노동을 그리워하게 된다. 권태를 없앨 노동을 찾아 나선 백수 박 모 씨는 결국 토요일이 행복한 이유가 고단한 노동으로 채워야 하는 평일의 존재 때문이라는 걸 설핏 깨닫게 된 이후, 점차 일중독에 빠져 중용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결국 주말을 싫어하는 변태적 워커홀릭이 된다, 뭐 이런 이치(?)는 아닐까....

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결론 :

일정량의 적절한, 다시 말해 중용의 고통이 권태와 변태성에서 너를 구원하리라.


영화 <변태가면> 의 한 장면. 채찍으로 처맞아도 좋단다...


사족 :

"야! 두 마디 넘도록 한 프렛 아래를 연주하면 어떡해? 이상하다는 거 못 느꼈어?" 축연이 끝나고 후배 H 군에게 이렇게 따졌다. 역시나 그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음... 어쩌면 이것이 몰아의 경지라는 것일까. Flow라 일컫는 것.

괜한 질책이었을까?

생각을 바꾼다. 적어도 음악을 어느 정도 안다면, 아니 21세기를 사는 포스트모던아재를 자처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것도 나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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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H군 같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에게 돌을 던지면 아니 된다.

화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물의 분자식이 H2O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나 깉은 인간만이 돌을 처맞을 자격이 있다.


-2015.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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