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소환하는 과거
"아버지는 전축에 음반을 걸 필요가 없었다. 연주회를 실제와 거의 다름없이 상상으로 들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양한 분위기와 해석으로, 심지어 아버지 자신의 즉흥 연주를 가미해서 듣는 것도 가능했다."
-올리버 색스, <뮤지코필리아> 중에서
K대(군대) 시절의 얘기다.
내가 군대에 있었을 때는 휴대폰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음악을 선택해서 들을 방법이 없었다. 간혹 휴가를 다녀온 선임들이 몇 개 정도의 카세트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내무실이나 사무실(나는 행정병이었다)에서 조그만 오디오 기기를 통해 틀어놓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내가 듣고 싶었던 음악은 아니었다. 헤비메탈이나 클래식기타 음악 같은 비주류 음악을 누가 좋다고 틀어놓았겠는가?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의 <대성당 La Catedral>이 너무나 듣고 싶었을 때, CD는커녕 카세트테이프조차 없었던 나는 나름의 감상법을 찾았다. 상상으로 그 음악을 재현하는 것이다. 바흐의 <샤콘느(Chaconne BWV 1004)>도 그렇지만, <대성당>의 모든 부분의 음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올리버 색스의 아버지처럼 특출 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군 입대 전에 이 곡을 암보해서 연주하였기 때문이었다. 영화나 연극으로 말하자면 이미 대본을 다 암기한 상태였다고나 할까.
사무실을 나오면서 머릿속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곡의 세 번째 부분, Allegro Solemne의 빠른 아르페지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소리인 것처럼. 음악의 템포에 발걸음 맞추기라도 하듯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음악이 피날레를 향해 치달을 무렵, 뒤쪽에서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은 끊기고,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미쳤어?"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풍경이 다소 낯설었다. 부대 위병소를 벗어나 있었던 거다.
"너, 어디 가냐? 말도 없이!" 위병조장인 X병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다그쳤다. "새꺄, 부대 밖으로 나가려면 신고를 해야 할 것 아냐!"
허가 없는 외출은 곧 탈영에 다름 아니다. 딴생각하느라 부대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깜박임을 멈춘 그의 눈과 부동자세는 어이없다는 심경의 표현이었을 테고,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가끔 생각한다.
내 생에 있어서 이 순간만큼 몰입한 적이 또 있었던가? 상상으로 듣는 음악에 푹 빠져서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어디로 가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한 적이 더 있었던가? 어여쁜 처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전봇대에 부딪히거나 맨홀에 빠진 적이 있었던가?
맨홀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생각나는 몰입의 순간이 있다. 중딩 시절의 얘기다. 비 오는 어느 날인가, 교실문을 열고 내 자리를 향해 걸어갔을 때 일순간 교실이 조용해졌고 학우들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망상에 빠져있느라 그때까지 우산을 접지 않은 채 들고 서 있었던 거다.
보다 창조적인 몰입의 순간이 있었다. 몇 년 전, 편곡 작업을 하고 있었을 때다. 한 남학생이 레슨을 받으러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15분 동안만 지난 시간에 배운 곡을 연습하고 있으라고 요청한 후 다시 편곡 작업에 매진하였다. 1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리라 판단했을 때 고개를 들어 그 학생에게 물었다. "이제 시작할까? 15분 다 됐지?" 그러자 그 학생은 뿌루퉁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40분 지났는데요."
드문 일은 아니다. '찜'해 놓았던 어느 여학생과 소개팅에 이르러 첫 대면을 했던 순간의 시간에는 가속이 붙은 것 같았으니까.
몰입은 미래로 향하는 타임슬립이다.
어떤 종류의 몰입은 과거로 향하는 타임슬립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망각되었다고 판단된(그리하여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들을 소환하는 타임슬립 말이다.
우연히 맛본 어떤 음식을 통해 무의식 속 기억이 환기되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프루스트 효과'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유명한(하지만 너무나 길고 장황하며 읽기에 만만치 않은)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번째 권 초반에 나오는 마들렌 과자와 홍차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작중 화자는 이 음식들을 취하는 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다. 망각되었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된 것이다.
사실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맛이 아니라 냄새라고 한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다음의 일화를 소개한다.
어떤 교수가 한 동행인과 함께 시골길을 걸었을 때, 무의지적으로 자꾸만 재생되는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대화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교수는 기억이 환기된 최초의 시점이 어떤 농장을 지났던 순간임을 알아채고, 동행인과 함께 길을 거슬러 다시 그 농장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자신의 기억이 그 농장의 거위들 특유의 냄새에 의해 촉발된 것임을 깨닫는다. "교수는 산책을 나와 농장을 지날 때 무의식적으로 그 냄새를 맡았으며, 이런 무의식적 지각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을 불러왔다.(...) 이러한 '계기' 또는 '자극' 효과를 가지고, 어떤 광경이나 냄새나 소리가 과거의 어떤 환경을 회상시키는 단순한 기억의 경우들뿐 아니라 신경증적 증후의 발병도 설명할 수 있다."
냄새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프루스트 효과가 있음에 주목해 본다.
과거(의 대상)를 소환하는 음악에 대해 언급하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 롹밴드 <Boston>의 그 유명한 데뷔작, <More than a feeling>이다(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당시 데뷔음반 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1976년에 발표된, 거의 반 세기 전의 음악임에도 특유의 세련미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MIT 공대를 졸업한, 기타리스트 탐 숄츠의 음악 창작과 (레코딩) 엔지니어링 능력에 기인한 것이리라. 보컬리스트 브래드 델프의 엄청난 고음(아래 영상에서 3분 33초 지점 이후)과 긴 호흡(4분 14초 지점 이후)은 이 노래를 치장하는 보석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음악이란 이런 것이다.
블로거 <방관자>님은 가사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작곡자 탐 숄츠(Tom Scholz)는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Left Banke의 <Walk away Renée>가 마음속에 남긴 섬광을 떠올리며 "한 곡이 기억이 통째로 소환하는 마법"을 구현하려 했다. 그래서 가사 속 화자는 옛사랑 '매리언(Marianne)'을 직접 찾아가지 않고 오래된 멜로디에 몸을 맡겨 그녀와 재회한다. 'More than a feeling'이라는 제목 역시 감정 이상의 심상 ㅡ 즉 음악이 불러오는 시간 여행ㅡ을 선언한다.]
나로서는 쓸 수 없는, 멋진 리뷰다. 아마도 가사의 영향(또는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전 세계의 네티즌 청자들은 댓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감상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처음 서핑을 하던 때가 떠올라요. 이제 저는 60대죠. 그건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이었어요.
-이 노래는 지금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배웠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하지만,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했던 소중한 추억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제 막내 동생이 3월 11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노래는 동생이 가장 좋아하던 곡이었어요. 동생의 아내가 추도식에서 현악 4중주단에게 "More Than a Feeling"을 연주해 달라고 했는데, 마치 영혼이 육체를 떠난 듯한 느낌이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곡이었죠. 그 후로 매일 밤 유튜브에서 이 노래를 틀어놓고 있어요. 4분 45초 동안 동생 곁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사랑해, 버바.
-헤드폰을 끼고, 연기가 영혼을 감싸고, 나는 살아있음을 느껴. 이 순간을 살게 해 줘서 고마워요, 신이시여. 당신은 내게 세상을,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단어들을 주셨어요. 2025년 7월 9일.
재미있는 소감의 댓글도 있다.
-저는 13살이었고, 머리카락이 새로운 곳에 자라기 시작하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기억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다음의 댓글들은 새삼 와닿는다. 아마도 새로운 곳에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색될 때 깨닫게 되는 통찰(?)일 거다.
-젊었을 때는 노래를 즐기지만, 나이가 들면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인생은 정말 빨리 지나가죠. 만약 당신이 젊고 이 말을 듣고 있다면, 모든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흐름에 맡기되, 매일매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어느 날은 18살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50살이 되어 있을 거예요.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과학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드뢰서는 저서 <음악본능>에서 이렇게 썼다. "음악은 냄새와 마찬가지로 이런 회상을 일으키는 강력한 촉매의 역할을 한다."
[... 예컨대 어떤 사람이 한 노래를 옛사랑과 연결했는데 그 노래를 2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듣는다면, 그의 감정 체험은 매우 강렬할 수 있다. 영국 작가 닉 혼비(Nick Hornby)는 산문집 <서른한 곡의 노래(31 songs)>에서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노래 31곡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약에 내가 1975년에 <선더 로드(Thunder road : 작사/작곡/노래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를 어느 소녀의 침실에서 괜찮은 노래라고 느끼며 들은 뒤에 그 소녀를 본 적도 없고 그 노래를 그리 자주 듣지도 않았는데 지금 다시 그 노래를 듣는다면, 아마도 나는 그 소녀의 방취제 냄새를 맡을 것 같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도 말했다. "음악은 누군가에게 잊힌 과거를 다시 회생시키고 눈물 속에 감추어진 슬픔을 다시 끄집어낸다."라고.
그럼에도 안타깝지만 음악을 통한 회상의 강렬함을 임의로 재현할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노래를 세 번 듣고 네 번째로 듣는다면, 효과는 벌써 눈에 띄게 약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체험이 현재에서 유래한 새로운 연상들과 포개질 터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흘러간 히트곡'을 방송하는 프로그램의 딜레마가 있다. 왕년의 히트곡은 그리운 기억을 되살리겠지만 그 기억을 마모시켜서 덤덤한 "그래, 그땐 그랬지."로 전락시킨다.]
결국 영원히 유의미한 소환은 없다. 반복으로 인해 기억은 의미의 무게를 잃어가고 정서의 습기는 점차 메말라 갈 뿐일 테니. 따라서 위 노랫말의 'familiar song'은 '늘 듣던'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친숙한'이라고 번역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기억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생각과 글들을 모으는 중에 공교롭게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유사한 소재의 영상이 공개되었다. 썸네일이 인상적이다.
당신의 기억은 능동태인가 수동태인가?
로버트 라이트는 저서 <불교란 무엇인가>에서, '마음을 모듈로 보는 모형(modular model of mind)'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마음을 모듈로 생각할 때 우리는 불교 명상지도자들이 흔히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은 스스로 생각을 만들어내며,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괴로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체인 우리의 자아가 여러 가지 생각들 중에서 하나의 생각을 선택하여 의식으로 끌어낸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불교의 핵심 주장을 끌어들인다. 즉 생각을 선택하는 능력이 자아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주체인 자아 자체라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볼 때 불교 명상 수행의 핵심적인 역설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아가 통제권을 쥐지 않았다는 사실을, 심지어 자아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자아는(아니, 자아가 없다고 했으니 자아 비슷한 무엇이) 더 큰 통제권을 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매리언'의 지난 모습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환기하도록 촉발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마음 상태는 의식적 자아가 거기에 들어가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 마음 상태는 느낌에 의해 촉발되며, 의식적 자아는 (원칙적으로 느낌에 다가갈 수는 있어도) 느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신이 새로운 마음 상태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내가' 힌디고 여겼던 행위의 주체, 즉 내 행위의 통제권울 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어쩌면 '느낌'인지 모른다. 메 순간 우리가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모듈인데, 특정 순간 어떤 모듈이 주도권을 쥘지 결정하는 주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느낌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자아가 사라지는 지점에 이르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
의식적 자아는 생각의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일어난 생각을 받아들이는 쪽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기억은 능동태인가 수동태인가? 심리학과 불교는 수동태라고 말한다. 이 말인즉, 우연적인 '촉(접촉)'에 의해서 '수(느낌)'가 발생하고, 이 '수'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서는 강렬한 과거에의 환기를 이끌어낸다는 것일 테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왜 의도적인 음악 재생의 반복이 기억(의 의미)을 마모시키는지 설핏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경우는 다르지만, 올리버 색스는 이렇게 썼다. "즐거움이든 카타르시스든 음악이 힘을 발휘하려면 부지불식 간에 슬며시 다가와야 한다, 축복이나 은총은 강제로 요구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위의 융이 소개한 일화를 빗대에 얘기하자면, 그 교수가 반복하여 의도적으로 농장의 거위 냄새를 맡는다고 하여 무의식에 저장된 과거가 재현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이 아니다.
...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모든 음악에 무감각한 상태였는데, 문득 이 곡조(브람스의 알토 랩소디)가 비수처럼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더니 이 집에서 있었던 즐거운 일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방 안을 뛰어다니던 어린아이들, 축제, 사랑, 일 등의 기억이 마구 밀려들기 시작했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화상록 <보이는 어둠> 중에서.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에서 발췌
내게도 한때 과거 기억을 소환한 독특한 촉매제가 있었다. 음식도 음악도, 그리고 광경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광경'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예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90년대 한국 영화 <비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로미(고소영 분)'를 사랑하는 '민이(정우성 분)'의 독백이다.
이상하게 로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 나 역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만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수지(가명)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거다(이 현상에 대해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세 번째 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니 헤어진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 다시 쓰려니 귀찮다. 예전 글을 카피하여 옮겨본다.
... 교민문고에서 프루스트 쌤의 가르침을 전수받던 날(<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서>의 한 부분을 읽은 일을 말한다)로부터 5,6 년쯤 지났을까. 어느 가을날, 친구와의 약속으로 신천역에 갔다. 인근의 먹자골목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10분쯤 지났을까, 다소 긴 생머리의 한 처자가 쓰윽 지나갔다. 그녀의 뒤태가 무심코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오랜만에 알 수 있었다.
그래, 수지는 이렇게 생겼었지...
수지의 얼굴이 표상으로서 나마 명료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또다시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그녀의 얼굴이 재현되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일이 미스터리인 이유는 이렇다. 내가 그날 골목에서 본 것은 그 처자의 뒤태였지 얼굴이 아니었다. 따라서 지나가는 그 처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의 뒤태가 수지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키도 그렇고, 몸매나 각선미, 그리고 신체의 비율이 그랬을 것이다.
기묘한 일이다.
뒤태가 닮았다는 이유로 어떻게 수지의 얼굴이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일까?
단지 무의식 속 그녀의 형상이 지나가는 처자와 상관없이 우연히 그 순간에 의식 위로 올라온 것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전이나 그 후에는 어찌하여 그런 우연이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이 기묘한 연관에 대해 그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확신한다. 누군지 모를, 지나가는 한 처자의 뒤태가 촉매로 작용함으로써 수지의 얼굴이 의식 위로 올라왔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마도 내 의지로 불러일으킬 수 없었던 얼굴에 대한 상실감이 서글펐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무의지적 기억의 대상조차 부재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우연적으로나마 음악이든, 냄새든 또는 그 무엇을 촉매제로 하든, 소환하고자 하는 단 하나 과거의 얼굴조차 없다는 사실이.
위에서 특정 음악의 재현을 통한 기억의 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썼다. "하지만 그 노래를 세 번 듣고 네 번째로 듣는다면, 효과는 벌써 눈에 띄게 약해질 것이다." 결국 오롯이 남는 것은 음악 그 자체다. 재현의 반복은 그 어떤 대상이든 (도종환 신인의 표현대로) '가구'처럼 밀려난다. 없으면 불편하지만 사실상 있어도 거의 의식되지 않는 '가구'.
모든 인식적 강렬함은 부재에서 오는 법이니까. 과거의 것은 타임캡슐에 넣어져 땅속으로 봉인된 후 오랜 시절이 흘러야 그것의 가치/의미가 상승하게 되는 것처럼.
누구 말마따나 부재야 말로 가장 강력한 현존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고, 망각은 강화되었다. 아니, 특정 대상에 대한 의미가 박탈되었다고 말해야 맞을 것 같다.
작금에는 더 이상 부재가 강력한 현존이 될 수 없다. 부재는 말 그대로 부재로만 남았다. 이제는 CD나 카세트테이프조차 없어 상상에 의존하여 음악을 듣는 일은 더이상 없고, 망실된 그 누군가의 모습을 애써 떠올릴 의지도 없다. 세월의 힘이다.
과거의 대상이 우연적으로 맞닥뜨린 음악으로도 소환될 필요가 없어진 것은 망집의 해소, 혹은 해탈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