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봄날이기를

ㅡ따뜻한 냉기?

by 지얼


몇 년 전 봄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창문 아래에 면한 길에 삼색이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길냥이 용 사료를 뿌려주었으나 아마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그 고양이는 내가 일하는 곳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동네 캣맘 분들이 사료와 물을 주어서 삼색이의 생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느 날인가 캣맘 한 분이 내게 요청을 했다.

"저... 여기 학원 앞에 고양이 사료와 물 좀 두어도 될까요?"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입구에서 3미터 정도 떨어진 공간에 두시라고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입구라면 고양이가 접근을 하지 않을 테니.


환기를 위해 학원의 현관문을 종종 열어둔다.

어느 날인가, 열어 둔 현관문을 지나 학원 안으로 삼색이가 들어왔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쫓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삼색이가 어슬렁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간택을 위한 간 보기였다는 것을.


며칠 후,

나는 삼색이에게 간택되었다.


너를 집사로 임명하노라

사료는 로얄캐닌을 추천하고

츄르는 매일 한 개씩 준비하도록

그리고,

목욕은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정을 붙이기 싫었던 나는 삼색이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러자 내 지인들이 저들 멋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친구 권 모 씨는 '따롱이.'

후배 신 모 씨는 '야색꺄.'

학원 초딩이들은 '지니.'


나는,

때로는 '야옹이(성의 없긴 하다).'

때로는 '양이(성은 고 씨)."

또 어떤 때는 '에옹이.'




그렇게 내가 일하는 학원은 지니의 집이 되었고, 나는 지니의 집사가 되었고, 뜨끈뜨끈한 노트북은 지니의 전기장판이 되었다.

지니가 자꾸 책상 위 노트북에 죽치고 앉아있는 통에 모니터 화면을 자꾸 가린다.

야, 좀 비키라고. 오구라 유나 상 얼굴이 안 보이잖아.

그래도 끝까지 개긴다.


할 수 없이 소파 위에 전기장판을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둔다. 잠시 후 담요가 따뜻해졌을 때 노트북 위의 지니를 번쩍 들어 담요 위로 옮겨 놓는다.

지니는 더 이상 노트북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아, 그리고 오구라 유나 상 얘기는 농담이다.)


집사가 이상한 걸 보고 있어...





군대 시절 이야기다.

입대 동기인 한 친구가 연애편지를 쓰다가 글이 막혔는지 내게 도움을 청한다. 나는 오글거리는 문장으로 거리낌 없이 대필해 준다.


어느덧 4월

눈송이처럼 벚꽃 잎이 날리고 있습니다

내게 이곳은 여전히 겨울입니다

아마도 당신이 멀리 있는 탓이겠지요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봅니다

당신의 따뜻한 냉기가 느껴집니다


동기 녀석이 물었다.

"야, '따뜻한 냉기'가 뭐야? 말이 안 되잖아?"

혀를 차며 한 수 가르친다.

"모순형용"

"그게 뭔데?"

"학교에서 안 배웠어? '작은 거인'이나 '소리 없는 아우성' 뭐, 이런 거."


'행인임발우개봉'이라고 했다. 다 쓴 것을 다시 읽어본다.

당신의 따뜻한 냉기.

멋진데?

아니....

좀 거시기한가?

(거시기=오글오글. 당시에는 '오글거린다'는 표현이 없었다.)

편지지를 봉투에 밀어 넣으며 생각한다.

뭐 어때.

내 여자도 아닌 걸.


그때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르고... 어느 날인가 한 후배에게 전화가 온다.

물음을 인사로 대신한다.

넌 아직도 겨울이냐?

그가 대답한다.

아니. 요즘은 봄이야

오호... 그녀랑 사이가 좋아졌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You are my sunshine이라는 노래도 있나 보다.

문득 '당신의 따뜻한 냉기'라는 시구(?)가 스쳐 지나간다.

그가 묻는다.

형은? 형은 아직도 겨울이야?

실소를 한 후 대답한다.

겨울은 무슨 얼어죽을.


그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간지났을 텐데.


내겐....

계절이 없어


오글오글~




귀가하기 위해 학원의 히터를 끈다. 지니가 깔고 누운 전기장판의 전원도 끈다. 부재 시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염려되어서다.

지니가 밤새 춥지 않을까?

담요 한 장을 더 꺼내어 위에 덮어준다.

그래도 마음은 영 불편하다.

새벽에 추울 텐데...


지니는 생각할 것이다.

'이상하다... 왜 저 집사가 가버리기만 하면 추워지는 걸까. 저 양반 있을 때는 분명 따뜻했는데.'

전기의 메커니즘을 알 리 없는 고양이에게는 집사라는 존재 자체가 온기의 원천으로 인식될는지도 모른다. You are my 히터

또는,

You are my 전기장판.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을 다룬, 정여울 작가의 어느 문학 에세이집의 제목은 <잘 있지 말아요>다. 이 제목, 솔직함이 참 맘에 든다. '나' 없이도 '네'가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단호한 거부.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너도 겨울이었으면 좋겠다,는.


'네'가 잘 안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니,

사랑이란 얼마나 도착적인가.


지니가 잘 있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냉기.... 말고,

따뜻한 온기 속에서.





사족 :

따뜻한 냉기 ---> 모순형용

따뜻한 온기 ---> 중언부언





왜 남녀 인간들은 존재 자체만으로 온기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https://youtu.be/V5hz1CqTuqk?si=1GY-F6mjDN3cmE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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