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의 작은 한국 푸미흥과 외국인 거리의 타오데인
베트남 호찌민시에는 작은 한국촌 푸미흥이 있다.
나는 맨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마치 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저녁 8시 경의 어둑해진 시간이라 그런지 한국과 다른 점을 못 찾았다. 길거리의 야경들이 한국의 어느 이름 모를 도시 같았다.
“여기가 베트남 맞아요. 한국의 어느 도시를 온 것 같은데요.”
세 번째 베트남여행 때, 함께 온 C 씨가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 말레이시아 코리아 타운이랑은 차원이 다르네요.”
그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듯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환자로 만난 친한 벗이었다. 내가 베트남이전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동반해서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따라나섰다.
당시 우리는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오래 거주하다 와서 더욱 그랬다. 말레이시아는 대표적인 코리안 타운인 암팡과 솔라리스가 있다. 암팡은 오래전 형성된 코리안 타운이었다. 솔리리스는 막 새롭게 형성된 코리아 타운이었다. 솔라리스는 새로 개발된 지역이고 국제학교나 교육 시스템이 발달되어 급속히 발전되어 말레이시아 대표 코리아 타운이 되었다.
푸미흥은 그런 솔라리스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예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점령한 것 같았다. 거리엔 한국인이 넘쳐났고 베트남인들까지 한국인처럼 보였다. 첫 번째 여행지였던 도심이나 구 코리안 타운 슈퍼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푸미흥은 전통적 베트남 거지지역이 아니었다.
주식회사 푸미흥의 대만사람들이 개발한 신도시였다. 지명인 푸미흥(富美興)은 중국식 지명으로 부를 아름답게 일으키자는 뜻이다. 실제 그들은 푸미흥을 개발하여 큰 부를 이루었다. 푸미흥을 둘러보면 베트남의 여느 지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파트와 작은 주택 등이 일률적으로 구획되어 있다. 거리가 넓고 작은 공원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의 분당이나 판교처럼 완전히 계획된 도시와 같은 느낌이다. 넓은 도로와 작은 공원들 주위로 사이공 강이 감싸고 있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러한 입지조건들로 인해 푸미흥은 한국인의 주요한 관광지이다. 작은 한국 같은 느낌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식당과 마사지 샵, 카페가 있어 먹고 휴식하고 충전하기엔 더없이 좋은 지역이다.
나는 세 번째 푸미흥 방문에서 베트남 이전을 결정했다.
말레이시아 거주에서 베트남 이전을 결정한 이유
한국에서 말레이시아행을 결정한 이유는 당뇨약 개발 때문이었다.
오래전 어머님이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로 당뇨완치는 나의 소명이 되었다. 당뇨 연구는 필생의 과제였다. 수많은 약재를 구해서 특효제를 만들어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혈당치를 내리고 완치할 수 있는 약을 개발했다. 그 후 당뇨약을 건강식품으로 출시하려고 투자를 했다. 엄청난 규모의 투자였지만 한국의 식약청은 만만치가 않았다. 한약류 건강식품에는 각종 규제가 심했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큰 규모의 건강식품 제조 회사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제조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여러 모로 알아보고 연구했지만 힘듭니다.”
제조사 사장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한약류 건강식품을 많이 제조해서 제품 출시를 자신했었다. 하지만 새로 추가된 몇 가지 조항이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 하는 수 없지요. 새로운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힘없이 말하자 그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시 외국이라면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동남아 등지는 제조가 한국보다 훨씬 쉽다고 합니다. 만약 동남아 국가에서 제조가 쉽다면 그곳으로 원료를 보내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는 말레이시아행을 선택했다.
동남아 국가 중에서는 비교적 규제가 느슨하며 중국인 거주가 많고 잘 사는 나라인 점도 감안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한의원을 개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을 깼다. 그곳은 원천적으로 당뇨 건강식품 개발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의료와 교육의 천국이기 때문이었다.
의료와 교육은 국가가 거의 무상으로 제공했다. 당뇨약의 경우 한 달 비용이 한국 돈으로 3천 원에 불과했다. 또 말레이시아인은 당뇨병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건강상식이 거의 없고 관심도 낮았다.
나는 결국 당뇨 특효제 개발을 포기해야 했다. 엄청난 투자를 했던 원료를 폐기조치 해야만 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한의원을 하며 그 이상의 엄청난 연구결과를 얻었다. 각종 난치병을 고치는 약재를 개발했고 임상치료의 획기적 효과도 달성했다.
그래서 베트남행 이전을 결정했을 때 주변 지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다시 베트남으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트남행을 결정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행을 결정한 4가지 이유
1.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베트남 약재의 다양성과 효과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베트남산 노니나 침향, 계피, 계지 등은 일부분이다. 베트남에서만 자생하는 약초의 종류가 무려 500가지가 있다. 베트남 특유의 약재를 ‘투억 남’이라고 해서 중국산 약재인 ‘투억 박’과 달리 분류하고 사용한다. 이는 바이오 분야의 연구나 특효제 연구를 위해서는 최고의 장점이다.
2. 한자 문화권의 유사한 문화적 전통과 한약 선호사상
베트남 사람들은 한약을 좋아한다. 그들 중 상당수가 양약의 부작용을 알고 한약의 효과를 믿고 있다. 한국처럼 TV나 매스컴이 세뇌나 마케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히트 친 의학 드라마는 대부분 큰 병원을 무대로 기적에 가까운 의술을 펼친다. 당연히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인 허구가 많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베트남은 그런 드라마가 없다. 오히려 한류열풍으로 ‘허준의 동의보감’이나 ‘대장금’이 대박 히트를 쳐서 한국 한의학을 높게 평가한다.
3. 풍부한 식자재와 베트남 음식류, 한국과의 비행시간과 교류
쌀국수나 월남쌈 등은 한국인들이 익히 알고 있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도 베트남 음식을 자주 먹곤 했다. 기름지고 맛없는 말레이시아 음식에 비해 맛도 있고 나름대로 건강식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베트남은 풍부한 식자재가 있어 한국식으로 음식을 만들기도 좋다는 장점이 있다. 또 말레이시아와 한국은 비행거리가 매우 멀고 교류도 쉽지 않다. 반면에 베트남은 공항까지 거리도 가깝고 비행시간도 짧다. 당연히 한국과 교류하기도 편하고 한국 왕래가 훨씬 쉽다.
4. 한국과의 활발한 경제교류와 세계에서 가장 젊은 인구분포의 발전 가능성
말레이시아는 외국 회사가 별로 많지 않다. 공장으로서의 입지나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무슬림들은 하루에 5번씩 기도를 해야 하며 일하기를 싫어한다. 이런저런 핑계로 결근을 자주 하며 무슬림 국가로 라마단(금식기간을 비롯한 각종 종교행사와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다. 이런 이유로 말레이시아엔 외국인 현지공장은 많지 않다. 반면에 베트남은 세계적인 핫 플레이스다. 세계의 공장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이전되고 있다. 또 베트남은 평균적으로 노인인구가 적고 젊은이의 인구비율이 높다. 앞으로 엄청난 발전 가능성이 있는 나라이다.
푸미흥으로 이전하고 나서 느낀 평화와 안정감
베트남은 행정구역이 군으로 나눠져 있다. 한국 같으면 도 단위에 있는 군의 단위가 시 단위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이런 단위에 사용하는 군을 도시에 적용한 것이다. 베트남어의 꾸언은 한국의 군과 같은 뜻이다. 지방 출신이라면 군이라는 단위에 익숙할 것이다.
푸미흥은 7군으로 분류되어 4군과 5군과 인접하고 있다.
나는 7군 푸미흥의 ‘하 후이 텁’이라는 도로명에 위치한 건물에 입주하여 한의원을 오픈했다. ‘하 후이 떱’은 호찌민 시의 호찌민 주석의 이름을 사용한 것처럼 개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다. “하 후이 떱‘ 은 베트남 전쟁 때 개선장군의 이름이다. 한자식으로 하면 ’ 하회섭‘ 으로 그 이름을 도로명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김일성 대학 같은 것과 유사한 공산주의식 방식이다. 도시명이나 거리명은 대부분 베트남 통일 전쟁의 개선장군의 이름을 많이 사용한다.
도시나 도로명이야 어떻든 푸미흥은 뜻도 좋고 살기엔 참 좋았다. 말레이시아와 달리 차가 필요 없었다.
말레이시아는 차가 없으면 생활자체가 힘들다. 그러나 푸미흥은 시장이나 가계, 식당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이 편안하고 안락했다. 특히 베트남은 카카오톡의 천국이라는 것이 특이했다. 거의 모든 식료품이나 상품 등이 카카오톡으로 다 해결되었다. 그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1000 톡, 3000 톡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1000 톡은 단체방 가입인원이 1000명이라는 뜻이고 3000 톡은 3000명이라는 뜻이다. 카톡을 열면 단톡방이 수십 개가 있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주문을 하면 집 앞까지 총알배송이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편리함과 공개된 정보, 커뮤니티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었다. 한의원 개원 이후도 매우 평화로웠고 안정적이었다. 환자유치엔 별 다른 마케팅이나 광고가 필요 없었다.
열대 약재의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될 수 있었고 임상적 결과도 매우 좋았다. 나는 푸미흥에서 수많은 난치병자들을 치료했다. 건선과 아토피, 황반변성, 초기 암, 뇌졸중 등 완치의 임상사례가 많다. 특이한 것은 베트남 약재 가미로 치료효과가 높아지고 빨라진 점이다. 푸미흥에서의 삶은 그렇게 평화롭고 안정을 찾았다.
7군 푸미흥을 떠나 다시 2군 타오디엔으로 이전한 이유
베트남의 한국인 거주지역으로는 크게 3군데로 분류된다.
구 코리안 타운인 슈퍼볼과 신 코리아 타운인 푸미흥, 그리고 최근에 부상한 2군 타오디엔이다.
2군은 외국인 학교가 많고 호찌민에서 비교적 문화 수준이 높고 부유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한국인 거주지역을 세분화하면 타오디엔과 안푸이다. 같은 2군은 아니지만 근처 빈탄 군의 빈홈 지역까지를 포함한다. 이들 신흥 거주지는 푸미흥보다는 규모가 작다. 하지만 작은 한국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인 거주 비율이 높다. 안푸나 타오디엔엔 한국어로 쓰인 간판이 눈에 자주 띈다.
나는 7군에서 빠르게 정착해서 평화와 안정을 이뤘지만 2% 부족감을 느꼈다. 그것은 외국인 내원환자의 비율이었다. 푸미흥은 작은 한국이라서 거의 한국인 사회이다. 당연히 외국인의 비율이 작다. 그런데 내가 하는 연구는 다양한 인종의 질병과 치료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인과 베트남인, 유럽인들의 체질과 질병, 치료방법은 다르다. 만약 한국인 중심의 치료만 할 경우 한계점이 있다. 예를 들면 베트남인들의 질병은 대부분 심장병과 뇌졸중, 비염, 축농증 등이다. 한국인의 경우 비염과 축농증 비율은 높지 않지만 베트남인은 그 비율이 매우 높다. 그럴 경우 그 분야 연구는 잘하지 못하게 된다. 체질의학의 치료로 보면 심장병과 뇌졸중, 특히 비염과 축농증 치료는 쉬운 편이다. 수많은 완치의 치료경험이 있다. 그로 비춰 보면 2군 이전을 하는 것이 합당한 결정이 되는 것이다.
연구와 도전을 위해서는 평화와 안정보다 도전과 모험을 택해야만 한다. 이전을 결심했을 때 많은 분들이 염려하며 만류했다. 친한 선배는 극구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2군 타오디엔으로 이전은 시기상조야, 그곳은 쉽지가 않아. 대부분 외국인 거주 지역이고 베트남인들은 상류층이라서 고객유치도 쉽지 않아. 여기 푸미흥이 잘되고 있는데 왜 가려고 해, 가지 않는 것이 좋아.”
나를 염려해 주는 고마운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선배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안주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원합니다. 푸미흥이 편안하고 좋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타오디엔이 쉽지 않다는 것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과 연구를 해 보고 싶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나는 결국 타오 디엔으로 다시 이전했다.
늘 그랬지만 도전과 모험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 반드시 개척의 결과라는 새로운 경험과 수확을 거둘 수 있다. 타오 디엔에 정착하고 나서 느낀 특이한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보통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이곳 외국인 거주 지역의 유럽인들이 한의원을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부분 서양의학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약의 부작용을 알고 치료의 문제점까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시아인보다 더 한의학을 잘 이해하고 침을 좋아했다.
베트남 상류층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병원을 싫어하고 한의원을 좋아했다. 이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특히 프랑스인과 스페인, 독일인은 침치료와 한약을 잘 알고 있었다. 2군 타오디엔으로 이전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그러하다.
지난주에 한국에서 친구인 베스트셀러 작가 김 작가와 토종 약초꾼으로 유명한 최진규 선생이 내게로 놀러 왔다. 나는 오랜만에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착민인 나와 달리 그들은 베트남 호찌민 관광을 원했다. 나는 근처 붕따우의 백운대 산과 사이공강 투어를 소개했다. 그곳을 다녀온 후 어제 다시 질문을 했다.
“이제 어디를 관광해야 하지? 어디가 좋아?”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느긋하게 타오디엔 카페와 레스토랑을 다니며 즐기는 것이 좋아. 여긴 유럽 문화와 베트남 문화가 결합되어 있는 지역이고 작은 한국 문화도 그중에 있어서 좋은 거지. 나머지 하루는 7군 푸미흥으로 가는 것이 좋아. 푸미흥은 작은 한국이야. 한국 문화가 주류이고 베트남 문화가 섞여 있어 재미가 있어, 한국인들의 관광명소이기도 하지.”
나는 그렇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만약 베트남 호찌민으로 여행을 오신다면 이 두 곳은 작은 한국촌으로 반드시 거쳐야 할 좋은 코스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