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대 후반 같은 호찌민 변두리의 재래시장과 약방거리, 한의원
첫 번째 베트남 방문 이후 한동안 잊고 있었다.
다른 동남아 국가와 별반 차이 없는 중심가만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말레이시아를 비롯하여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의 나라들도 대략 비슷비슷했다. 베트남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사촌인 C 씨가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호찌민에 푸미흥이라는 곳이 있어요. 공항 근처 슈퍼볼이라는 코리안 타운보다 훨씬 좋아요. 그곳은 한국과 같아요. 아주 좋아요. 언제 그곳에 한번 가 봐요.”
그녀의 말을 듣고 믿기지가 않아서 물어보았다.
“호찌민 도심지가 말레이시아보다 훨씬 못하던데요. 코리안 타운이라는 슈퍼볼 근처도 삭막해서 별로 좋지 않았어요. 푸미흥이라는 코리안 타운이 따로 있다는 건가요?”
“공항 근처는 예전 코리안 타운이라고 해요. 말레이시아 코리안 타운이 암팡에서 솔라리스로 변했듯 베트남 호찌민 코리안 타운도 그렇다고 해요. 푸미흥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새로운 코리안 타운인 거죠. 그곳은 마치 한국의 한 도시와 같아요.”
그녀는 푸미흥이 핫 플레이스가 될 것이라 말하며 다시 한번 같이 가보자고 했다. 솔깃한 제의였다. 첫 번째 방문보다 조금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첫 번째 방문 때는 몰라서 가지 못했던 장소였다.
두 번째 방문은 그렇게 이뤄졌다. 우리 가족과 그녀의 친한 그룹이 함께 베트남으로 갔다. 단체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따로 가서 그곳에서 각자 호텔을 예약하고 만나기로 했다.
두 번째 여행에서 새롭게 발견한 호찌민의 풍경
두 번째 베트남 여행은 처음과 사뭇 달랐다. 변두리를 다니며 베트남의 민낯을 살폈기 때문이었다. 숙소지로 잡은 호찌민 7군에 위치한 코리안 타운 푸미흥은 대단했다. 말레이시아의 구 코리아 타운이었던 암팡과 신 ㅣ코리아 타운인 솔라리스와는 스케일이 달랐다. 눈을 가리개로 그곳까지 데리고 가서 보게 하면 한국인지 베트남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한국어 간판이 따닥따닥 연결되어 있었다. 식당이나 베이커리, 문방구, 슈퍼마켓, 옷가게, 기념품가게 등이 즐비했다.
거리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이 베트남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에서 가끔 보이는 베트남인들도 한국인과 크게 구별점이 없었다. 대부분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게에 근무하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듯했다.
마치 한국의 어느 도시를 떼어다가 베트남에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말레이시아 거리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히잡을 뒤집어쓰거나 검은 모자를 쓴 무슬림들이 없었다. 검은 피부에 핏줄 선 눈빛을 지닌 아프리칸더 보이지 않는 도시였다.
피부색이나 얼굴이 한국인과 큰 차이 없는 베트남인들을 보는 것은 마음이 편했다. 사람은 최소한 3번을 봐야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방문에서 베트남의 모습은 첫 번째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달랐던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70년 대 후반으로 되돌아간 느낌
푸미흥 변두리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본 풍경은 어딘지 낯익었다.
기억을 더듬어 데자뷔 같은 느낌의 원인을 찾았다. 어린 시절의 시골 풍경이었다. 마치 70년 대 후반의 어느 흑백사진 속에 들어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낡은 판자 집과 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좁은 길이 그랬다. 대도시 속의 가난한 시골 풍경 그대로였다.
하수구가 흐르는 좁은 수로와 사이공강 지류의 작은 강도 시커먼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재래시장에 갔을 때는 시골 장날과 같았다. 푸미흥 근처의 떤미 시장은 북새통이었다. 수많은 오토바이와 차들, 사람들이 신호등 없이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묘하게도 시골장날의 그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시장입구에서부터 시장까지 요리 저리 피해서 겨우 들어갔다. 시장 안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다듬지 않은 날 것의 느낌 그대로였다. 생과 사가 극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살려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과 사람들이 선택하면 죽어야 하는 생명체가 그랬다. 생선은 한국에서도 그렇게 하지만 닭과 오리, 야생의 새들은 낯선 풍경이었다.
그 생명체를 주문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가위로 목을 자르고 뜨거운 물에 넣었다. 그리고 털을 빼주는 기계에 넣고 즉석에서 원하는 대로 장만을 했다. 방금 전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가 음식이 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0분에서 30분이면 생명체가 검은 비닐 속에 담겨 있었다.
나중에 베트남으로 이주하고 나서 한 번 그렇게 주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살해교사’ 한 것 같은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한 생명체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같아서 단 한번 이후에 다시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재래시장은 70년대 후반의 한국 장터처럼 노점도 많다. 길 모퉁이와 길 한가운데도 좌판을 깔과 있었다. 길가에서 생선을 파는 상인들은 그곳에서 즉석 생선장만을 했다. 큰 생선은 큰 칼 대신 몽둥이로 내리쳐서 기절을 시킨 후 칼을 사용했다.
타이머신을 타고 아득한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재래시장은 익숙했고 그곳에서 과일을 사서 먹기도 하며 주변을 걸어 다녔다.
베트남 재래시장에서 한국 재래시장과 특히 닮은 것은 거리의 약재였다. 더덕과 도라지, 베트남 약재 등을 파는 노점상과 가게는 한국과 거의 비슷했다. 시골 할머니 몇 분이 난전을 펼쳐 놓고 약재를 파는 곳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약재들을 살펴보며 바디 랭귀지를 했다.
‘먹을 수 있나요’를 입으로 그것들을 먹는 시늉을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고 뭐라고 베트남 어어로 말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대략 몸에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근처 약재 가게도 자세히 들어가서 약재를 살펴봤다. 대표적인 베트남 약재들인 노니와 계피, 육계, 침향 등이 있었다. 많은 베트남인들이 약재들을 구입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감기나 기침 등의 처방을 한 약재를 작게 포장해서 판매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베트남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재가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지간한 약재는 보면 바로 알기 때문에 베트남 특산 약재는 구별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한의원을 보고 느낀 동남아 한의학의 미래 비전
베트남 특산 약재가 많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베트남 한의원 탐방을 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의 경동시장과 같은 호찌민 최대의 한약 시장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곳은 호찌민 5군에 위치한 쩌른 시장이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큰 시장이라는 뜻의 쩌른은 말 그대로 아주 큰 시장이다.
그곳을 혼자 가서 둘러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간 그곳은 말 그대로 큰 시장이었다. 한국의 경동시장과 거의 유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좁고 구불구불한 길과 아주 작은 가게들이 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작은 가게마다 사람들이 연신 들락거린다는 점이었다.
환자인 것처럼 해서 한의원도 들러보았다.
수많은 한의원 중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을 택했다. 그곳은 작고 온갖 약재들로 복잡한 한의원은 한국과는 정말 달랐다. 70년 대 후반의 시골 약방 같은 느낌이었다. 진료를 하는 것도 시골약방과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맥을 하고 처방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 후반으로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당시는 베트남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벙어리와 비슷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배가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다행인 것은 베트남 한의사가 아주 기본적인 영어는 했다. 베트남 한의사는 진맥을 하고 나서 침을 보이며 침을 맞겠냐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트남 한의사가 놓은 침은 아주 엉성했고 아팠다. 둔탁하고 굵은 중국 침의 감각이 팔과 다리 여러 곳을 고문했다. 마치 스파이로 몰려 고문을 받는 느낌이었다. 한국의 예리하고 가는 침과는 사뭇 달랐다.
침을 맞을 때 침감은 별로 없었다. 통증만 느껴졌다. 침을 놓은 경혈의 위치는 부정확했다. 좋은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침을 맞고 나오자 약을 복용하겠냐고 영어로 말했다. 나는 3일 치 약을 달라고 했다.
나는 3일 치 약을 받아 들고 나왔다. 베트남 한의원 탐방 비용치곤 저렴했다. 나는 베트남 약재 시장을 두루 다닌 후에 베트남과 동남아 한의학의 비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약재나 진료체계를 보면 한국보다는 아직 한참 낮은 수준이었다. 경제 규모가 10배 이상 차이 나는 만큼 한의학의 수준도 그 이상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70년 대 후반으로 가서 2020년대의 첨단 한의학을 펼쳐야겠다.’ 두 번째 베트남 방문은 그러한 밑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