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적멸 9. 자네의 그 고통이 여기로 오게 한 거야.
승문은 형과 함께 읍내에 있는 약방으로 뛰어갔다.
나이 든 약사는 일찍 문을 열고 있었다. 승문은 다짜고짜 그에게 가서 말했다.
“울 누나가 다 죽어 가니더. 어떻게 하면 되능교??
“상태가 어떤지 잘 말해 보거래이.”
형이 가만히 있어 승문이 빠르게 말했다.
“눈이 이렇게 돌아다니고 목에서 끄으윽 꺼억하는 소리를 내니더.”
“아. 그럼 늦은 것 같아. 그만 집으로 가봐라.”
승문과 형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멀리서 통곡소리가 들렸다.
동네 이웃들이 문 앞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왜 저리 갑자기 저리 되어 버렸노. 어제만 해도 우리 집에서 놀던데.”
그들은 갑작스러운 죽음에 수군거렸다.
집안에 들어서자 문 앞에 큰 방석이 둘둘 말아져 있었다.
그 곁에 어머니가 땅바닥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아이고 왜 니가 이리 먼저 가노. 니가 가면 나는 어찌 사노.”
그때 승문은 누나가 죽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더 이상 집 어디에도 그녀의 존재는 없었다.
방석에 둘둘 말아진 시체가 그녀였다.
그 순간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었다.
그 기나긴 통곡소리는 한 달간 이어졌다. 당시 40대 중반의 어머니는 검은 머리가 순식간에 흰머리로 변했다. 아버지는 몇 달간을 술이 취한 채로 숨죽여 울곤 했다.
승문은 눈물을 흘리며 그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기억과 악몽에서 깨어나거라.”
청산거사의 낮으면서도 위엄 있는 말이 승문을 깨웠다. 승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승문을 보며 말했다.
“자네의 그 고통이 여기로 오게 한 거야.”
한참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승문이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저의 어떤 고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동굴은 금계포란형의 천하명당일세.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네. 이곳에서 명상을 하면 심연의 깊은 슬픔이나 고통, 악몽이 떠오르네. 알을 품는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나 생성, 출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네. 자네 역시 아픈 기억이나 악몽 같은 것을 떠올렸을 것일세. 그것은 자네가 찾고자 하는 그 무엇의 단초가 될 것일세.”
"여기 동굴의 기운이 저를 심연으로 끌어온 것인가요?"
"그렇지. 그 정도로 여기의 기운은 남다르다네."
그는 가만히 승문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자네를 이끌어온 심연의 기억이 무의식을 움직인 것이야."
“그 말씀은 저의 아픈 기억이 현재의식이나 미래에 까지 영향을 미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것이 저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말씀인가요?”
“자네의 현재의식은 과거의 수많은 점들이 연결된 것일세. 아픈 기억이나 악몽 같은 고통들도 모두 점이 되어 점이 찍혀서 오늘로 이어졌다는 뜻일세. 당연히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일세. 그것이 뿌리가 되어 현재의 줄기와 잎이 되고 미래의 꽃과 열매가 되는 것일세. 절대로 무관하지 않은 일인 게야.”
승문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의 의식 주변을 맴도는 기억들과 악몽이 나침반이 된 것 같았다. 또 무수한 과거의 점들이 여기까지 찍혀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