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베트남의 오토바이 여행
바람을 가르는 오토바이 라이딩의 자유로움과 행복감
“오토바이는 절대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한국인의 의식에 오토바이는 의도되지 않은 자살도구쯤으로 인식되어 있다. 주변에서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의 끔찍한 참상을 듣거나 보았던 탓이다. 한국의 오토바이 타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두 명의 유명한 연예인들의 사고가 알려주었다. 1977년 당시 25세에 큰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중견 탤런트 이덕화의 스토리는 너무나 유명했다. 수술을 53번 했고 열 번까지의 수술에는 생명이 위독했다고 당시 집도의가 말했다. 중환자실에 10개월을 입원했고 1500번 바늘을 꿰맸으며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2000년 31세 가수 '클론' 강원래의 오토바이 사고는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불법 유턴 차량과 충돌하며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척추부상으로 하반신 마비 1급 지체 장애자가 되었다.
오토바이를 생각하면 자연히 이 두 사람이 떠오르는 정도이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오토바이의 절실한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호찌민의 숨이 막히게 하는 열기와 따가운 해살 때문이었다.
사소한 일상용품을 사려고 길 건너를 갔다 와도 힘이 들었다. 걸어 다니면 땀이 줄줄 흐르고 얼굴이 후끈거렸다. 더군다나 호찌민의 오토바이는 대로변과 인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신호등도 지키지 않고 획획 옆을 지나친다. 위험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토바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땅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이 글을 다시 구성하고 윤색하는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
-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중에서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자기를 바꾼 한 남자의 특별한 '여행기' 라는 부제의 이 책은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바람을 가르고 달려가는 오토바이 혹은 모터사이클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나는 베트남 전역을 오토바이 여행으로 다니고 싶었다. 로망을 위한 오토바이 연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토바이가 위험한지 아닌지를 직접 체험하고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초보 베트남 살이를 하는 사람에게 자동차는 시한폭탄
처음 베트남 이주 직후에 불편한 생활 때문에 자동차를 구입하려고 했다.
이웃집 한국인에게 자동차 구입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자동차 구입은 절대 하지 마세요. 사업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자가운전이 안 됩니다.”
나는 그전에 말레이시아에 거주할 때 늘 자가운전을 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왜 자가운전이 안 되나요?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호찌민에는 오토바이가 너무 많아서 위험해요. 여기저기 불쑥불쑥 오토바이가 튀어나와 시한폭탄과 같아요. 일단 터졌다 하면 한국인이 모든 죄를 뒤집어 써야 합니다. 몇몇 한국인이 자동차 사고로 엄청난 보상금을 물려주고 한국으로 돌아간 적도 있어요.”
“자동차 보험이 있지 않나요? 그것으로 처리하면 문제가 없지 않나요?”
나는 다시 물었다
“베트남은 자동차와 오토바이 사고가 나면 모든 책임을 외국인에게 뒤집어 씌워요.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해요. 또 보험회사도 공안과 합작해서 외국인에게 책임을 다 전가해요. 보상도 제대로 안되고 합의도 잘 안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일가친척까지 동원해서 사업장에 와서 못살게 굴고 정말 골치 아프게 돼요.”
그가 결론을 내리듯 말을 덧 붙였다.
“베트남어도 잘하고 오토바이에 익숙해지고 도로 상황이나 교통법규에도 익숙하면 그때 자가운전이 가능해요. 처음 오시자 말자 자가운전은 너무 위험해요. 하지 않으시는 것이 맞아요.”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자동차는 포기해야 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오토바이 때문에 운전을 아무리 잘해도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우선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호찌민의 도로나 교통법규를 익히시고 자동차는 천천히 구하세요. 대부분 그렇게 합니다. 오토바이가 훨씬 타고 다니기에 편해요.”
나는 가족의 완강한 오토바이 반대를 떠올리며 말했다.
“가족들이 모두 절대적으로 오토바이를 반대해요. 오토바이가 더 위험하지 않나요?”
“호찌민의 대중교통이 오토바이라서 오히려 안전하다고 해요. 물론 베트남 전역으로 보면 자동차로 하루 1명 이상 죽는다고 해요. 베트남 1억 인구 비율로 보면 그리 높지 않은 거죠. 한번 잘 연구해 보세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오토바이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안전성 연구를 위한 그렙 오토바이 타기
호찌민에는 오토바이 그렙이라는 것이 있다.
휴대폰 앱에 깔린 그렙에서 오토바이를 선택하면 대부분 3분에서 5분도 걸리지 않아 오토바이가 온다.
자동차 그렙은 시간이 일정치 않다. 3분 이내로 액정에 표시가 되어도 10분이 될 수도 있다. 베트남어로 껫세(자동차 정체)라고 하는 교통체증 때문이다. 그렙 자동차가 정체되면 택시를 타고 싶지만 중심가가 아니면 택시를 잡기가 매우 힘들다. 보통의 베트남인들은 비싼 그렙 택시는 잡지 않고 그렙 오토바이를 탄다.
나는 오토바이 연구를 하기 전에는 주로 그렙 자동차를 탔다. 하지만 연구를 하기 시작한 날로부터 3개월 동안 그렙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했다. 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지역은 한의원이 있는 7군에서 약재상이 있는 5군까지의 거리였다. 실제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렙 오토바이로 가면 30분에서 40분 정도 걸렸다. 5군의 쩌른(큰 시장)은 꼬불꼬불한 골목길 구석구석에 엄청난 수의 약재상이 있다. 나는 그곳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특이한 약재를 구경했다. 그곳은 한국의 약재상인 제기동의 ‘경동시장’과 다른 점이 있어 좋았다. 약재상이 대개 오픈형이고 이리저리 구경해도 따가운 눈총을 주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 살 때 중국집 식당이 그와 비슷했다. 한국 식당은 일단 들어가면 사람 수만큼 주문을 해야 하고 매출에 손님이 신경을 좀 써야 했다. 식당 주인이 인사도 건네고 메뉴도 추천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 식당은 소주나 중국술을 가져가서 마셔도 되고 매출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중국인 식당 주인은 있는 듯 없는 듯 테이블을 주시하지도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한국 식당은 분위기도 달랐고 외부 반입의 주류는 용납이 될 수 없었다. 주문을 조금 하고 오래 앉아 있으면 눈치가 보였다. 심지어 친하게 지냈던 식당 주인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번에 골프 같이 친 적이 있는 K 씨 있잖아요. 그 사람은 부부가 같이 여기 와서 김치찌개 1인분을 시켜 놓고 둘이서 나눠 먹어요. 정말 가난하게 사는 가 봐요. 일단 둘이 식당에 왔으면 2인분 시키는 것이 맞잖아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가 말하는 K 씨의 부인은 내가 운영하는 한의원에 자주 오는 위장병 환자였다.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조금밖에 못 먹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의 사정도 모르고 그렇게 말할까?
또 내가 느꼈던 당혹감은 나 역시 가끔은 둘이 식당에 가면 1인분으로 나눠 먹을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음식을 먹었지만 상대를 위해 식당에 갈 경우 그럴 수가 있지 않은가.
베트남의 한약상은 말레이시아 중국 식당처럼 부담을 주는 것이 없어 좋았다. 당시 나는 베트남 약재와 한국 약재를 비교하기 위해서 약재를 만지고 살펴보곤 했다.
처음 그렙 오토바이를 탈 때는 기사의 옷을 꽉 잡고 탔다. 그러다나 오토바이 뒤를 한 손으로 잡다가 나중에는 손을 무릎 위에 놓고 탔다. 그렇게 한 이유는 베트남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절대 어디를 잡지 않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여성은 다리를 꼰 채로 휴대폰을 하면서 다녔다. 외부에서 보면 아찔하게 느껴지지만 오토바이를 타면 그렇게 해도 되었다. 손으로 무언가를 잡지 않아도 안전했다.
가끔 5군에서 7군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5군에서 사이공 강을 건너는 다리에 밀집한 오토바이 부대가 그랬다. 개미지옥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수의 오토바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렙 오토바이 뒤에서 나는 그 모든 생생한 장면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완전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오토바이가 약간 충돌하면 웃으며 지나갔다.
몇 번을 그 개미지옥을 경험하면서 오토바이가 매우 안전하다는 것을 느꼈다. 로터리를 돌아가거나 좁은 길에서 많은 오토바이가 지나다녀도 큰 문제가 없었다.
3개월의 관찰과 연구를 통해서 베트남 오토바이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 여행이 안전한 이유는?
첫 번째, 베트남의 대중적인 스쿠터와 오토바이가 한국의 대형 오토바이와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배달 스쿠터나 오토바이를 제외한 고급 오토바이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베트남 호찌민에서 오토바이나 스쿠터의 속도는 대략 30킬로에서 40킬로이다. 보통 125CC 이하이고 빠른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늦은 밤 시간에 거리가 텅 비어도 80킬로 이상 속도를 내기가 어렵다.
두 번째로 도로에는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혼재하지만 오토바이 전용 도로가 있어 안전하다는 점이었다. 가끔 자동차와 겹치는 구간도 있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 또 자동차는 수많은 오토바이 때문에 빨리 달릴 수도 없고 안전 운행을 한다. 무리한 오토바이 운전을 하지 않는 한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세 번째로 경찰국가 베트남의 교통경찰의 싸이카 감시가 엄격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한국의 1인 싸이카와 달리 반드시 2인 1조로 다닌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숨어 있다가도 튀어나오고 왕래가 많은 구역에서 감시를 하고 있다. 속도나 신호위반을 할 수가 없다. 늘 그들을 의식해야 해서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타야 한다.
네 번째로 베트남인들과 달리 한국인은 사주경계를 본능적으로 잘한다는 점이었다. 베트남인들의 오토바이는 백미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이 많다. 그들은 백미러를 잘 보지도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린다. 반면에 군대를 갔다 온 한국인은 사주경계를 아주 잘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주변을 살피며 심지어 백미러를 보고서도 사각지대를 피하기 위해 직접 고개를 돌려 확인까지 한다. 당연히 안전할 수밖에 없다. 베트남인은 그렇지 않다. 절대로 주변을 살펴보는 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가 사고를 많이 당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생각하면 오토바이는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3개월 후에 새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외국인은 오토바이를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베트남인 이름으로 등록을 했다. 그리고 소유권은 공증을 받았다.
처음 오토바이를 탈 때는 조금 힘들었지만 바로 적응했다. 매우 안전하고 편리했으며 바람을 가르고 타는 기분이 상쾌했다. 곧장 오토바이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베트남에서 친하게 지내는 환자 한 분은 오토바이 여행을 추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베트남 전역을 여행하면 너무 좋아요. 가다가 피곤하면 쉬고 베트남 민박집에서 숙박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이지요. 오토바이 여행을 한 번이라도 하면 바로 현지화가 돼요. 베트남 사람처럼 생각이 변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거지요.”
그의 말을 그때는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은 이해를 한다. 짧은 오토바이 여행을 통해 현지화되고 있는 자신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오토바이 여행의 자유로움과 행복
산이 없는 호찌민은 강변이 아니면 바람이 별로 없다.
그런데 사이공 강으로 둘러싸인 호찌민에서 강변의 도로를 달리면 바람이 시원하게 이마에 닿는 느낌이 참 좋다. 바람이 나를 키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기도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自畵像)에 나오는 유명한 시구이다.
나는 오토바이를 탈 때마다 이 시구에 나오는 바람을 떠올린다. 실제 바람은 사람을 키우기도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바람을 통해서 성장하며 튼튼해진다.
바람은 풀과 나무를 흔들어 운동을 시키고 비바람이 불면 목욕을 시켜준다. 또 뿌리와 가지가 약한 나무나 풀은 바람에 의해 튼실해진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숫 사자는 갈퀴를 바람에 날리며 서 있을 때가 멋있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이 아름다운 것도 바람의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행동반경이 대폭으로 넓어졌다. 7군에서 근처의 4군과 8군으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1군까지 나간 적도 있다. 군데군데 하이에나 같은 교통 공안(경찰)이 있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요령이 생겼다.
오토바이 구입 후 1년 안에 교통 공안(경찰)한테 4번이나 잡혀서 벌금을 냈다. 아무런 위반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머니 머니'를 외쳐서 벌금을 부과했다. 그때 베트남어나 영어를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베트남인들은 묘한 심리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베트남어를 서툴게 하면 오히려 봉으로 본다, 두 번째는 어느 가계이든 단골이 되면 바가지를 더 많이 씌운다. 한국인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다. '아는 놈이 도둑넘이다.'는 오래된 한국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1년 이후엔 그것을 알고 공안이 잡으면 모르쇠로 일관했다. 베트남어나 영어를 알아들으면서도 고개를 흔든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그들의 눈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은 의사불통에 의한 시간 낭비를 하기 싫어한다. 대부분은 그냥 가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해서 그 후 한 번도 벌금을 낸 적이 없다. 한국인 혹은 일본인, 중국인이냐고 물어도 고개를 흔들면 그들은 난감해한다. 일부러 시간을 끌면 그들은 바로 떠나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를 탈 때의 가장 큰 문제인 공안(경찰)의 통제를 벗어나면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도로의 상황과 교통법규, 오토바이 타는 기술 등은 반드시 익혀야 한다.
나는 오토바이의 기술적 문제와 여러 가지 필요한 지식은 따로 익혔다. 베트남에서의 오토바이는 현지화의 증거이고 바람과 자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와 바람, 강변은 늘 함께 하는 절친
가끔 스트레스를 받을 때나 기분이 울적할 때 오토바이는 최고의 친구이다.
특히 어둠이 깔린 밤 강변의 오토바이는 환상적이다. 강변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강바람을 맞으며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면 너무나 평화스럽다.
나는 오토바이 덕분에 밤하늘 북두칠성을 찾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나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지의 여행에서 한 번도 북두칠성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밤하늘 북두칠성을 찾아 헤맨 끝에 베트남 호찌민에서 그 별을 볼 수 있었다.
강변을 따라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밤하늘을 관찰하여 얻은 쾌거(?)였다.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절대 북두칠성은 못 찾았을 것이다. 카시오페아 자리 옆에 북두칠성이 있는 것은 알지만 이상하게도 동남아는 그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 북두칠성을 찾은 날 그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한국은 태백산 정상의 첨성단에 가면 북두칠성이 쏟아질 듯이 떠 있다. 사람들이 그곳을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 북두칠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북두칠성을 본 것은 희귀한 일이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짧은 거리의 오토바이 여행은 그 밖에도 많은 것을 생생히 보게 한다.
가끔은 복잡한 베트남 재래시장으로 가서 식자재를 잔뜩 싣고 오기도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자유로움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참으로 좋다. 서정수 시인의 마음과 같이 나 역시 그렇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 맞는 것 같다. 강변에 오토바이를 대놓고 그위에 앉아서 바람을 맞으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