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침향의 향기 9. 치유의 향과 생명을 구하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죠.
승윤의 깊은 슬픔을 알고 난 다음부터 수진은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더 자주 더 자연스럽게 만났다. 가끔은 보니파시오의 전문 영문판 서점에서 책을 골랐다. 하이스트리트의 공원길을 걷고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가끔씩은 보니파시오에서 업타운까지를 걸어갔다.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수많은 인파들과 경찰, 경비원들이 거리의 모퉁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보니파시오는 최신의 신도시이고 서울의 그 어떤 도심보다 공원조성이 잘되어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사진을 찍고 싶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이름을 부르지 않은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수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자신의 아픔을 꺼내놓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요. 치료를 하는 사람은 환자와 심리적인 거리를 두어야 하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예기치 않는 감정으로 함께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수진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외의 사람도 있을 수 있죠. 그런 사람이라면 서로의 아픔을 꺼내놓고 힘들어서 무너질 것 같은 순간도 서로 함께 버티면 좋지 않을까요?”
승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말은 고백이었다. 애써 감정의 선을 허물어 뜨리며 승윤에게 다가서는 선언이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감정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 후, 승윤이 수진에게 작은 나무 상자를 주었다.
“구남침향 조각입니다. 오랜 시간 공기 속에 묻혀 수지로 변한 나무죠. 이걸 태우면 향이 피어나요. 아주 천천히, 그러나 깊게 나요. 이것을 한약으로 만들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를 구할 수가 있어요. 이건 작지만 엄청나게 귀하고 비쌉니다.”
“이 침향이 엄청나게 비싸다고요?”
“이 구남침향은 보통 1그램에 10만 원 이상을 호가합니다. 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영물입니다. 지니고만 있어도 아주 좋다고 해요.”
수진은 상자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말했다.
“그럼 이 향은… 너무나 소중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 같네요. 금방 태우면 안 될 것 같고 오래오래 피어야 하는 천상의 향기가 담겨 있을 것 같아요.”
승윤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이 구남침향은 치유의 향기와 생명을 구하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죠. 죽어가는 사람도 이 침향을 복용하면 다시 살아난다고 해요. 우리의 마음이 만난 자리에도 이 향기가 피어오르길 바래요.”
"우리의 마음이 만난 자리에 가면 마음을 구할 수 있을까요?"
"어디서 마음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자신만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예전에 등산을 하는 길에서 가까운 곳의 불경소리를 듣고 갑자기 마음을 놓은 적이 있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물이 솟구쳤어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어요."
수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우셨다고요?"
"그렇죠. 내 마음의 어떤 앙금이 눈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연히 내 마음을 구한 거죠. 그 기억은 오래오래 가슴 한켠에 남아 있어요."
그날 밤, 그녀는 승윤이 준 침향 조각 하나를 깎아 향로에 넣고 불을 붙였다.
향이 피어오르며 은은한 침향이 주변을 맴돌았다. 그 향은 침향나무의 몸을 태우며 마음을 아늑하게 했고 정신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늘 느끼는 다른 침향의 향과는 무엇인가 달랐다.
진하지도 않고 연하지도 않은 향기가 코끝을 타고 들어와 전신의 혈관을 돌았다.
마치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듯이 가슴이 진정되며 동시에 애틋한 감정선이 살아났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는, 나도 내 마음을 구하고 싶다. 누군가를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를 이끌어가며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집중하는 순간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언뜻 스쳤다.
수진은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난 자리에 희미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