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외상 13. 치료가 아닌 마음의 여백으로 풀어야 할 때도 있어요.
“만 다지오 지역에 의료봉사를 가자는 연락이 왔어요.”
승윤이 잠시 생각을 한 후에 다시 말했다.
“의료 소외 지역이고 좀 위험하긴 합니다. 그런데 꼭 가고 싶어요. 힘들지만 필리핀에 온 것은 이곳이 섬이 많은 나라여서 의료 소외 지역이 많아요.”
수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럼 여기 한의원은요?”
“당분간은 격주로만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언젠가는 거기서 상주하며 일해보고 싶어요. 제 영혼이 봉사하는 삶을 원해요.”
승윤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가 가진 ‘치유의 철학’은 늘 의료봉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진작에 의료봉사를 통한 기쁨과 보람을 알고 있었다. 이제 행동에 나설 때임을 느끼고 있었다.
수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가는 곳이… 누군가의 숨이 놓이는 자리라면, 가야죠. 당신답게.”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 작은 통증이 밀려왔다. ‘우린 다시, 멀어지는 걸까?’
의료봉사를 다녀온 후, 도윤은 많은 위로와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은 통증이 전혀 없는 치료를 시도했다.
“심리적 외상은 치료가 아닌 마음의 여백으로 풀어야 할 때도 있어요. 따뜻한 말 마디와 행동이 누군가를 위로하고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침을 놓지 않을 겁니다.”
수진은 승윤의 진료일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람의 회복은 결국 ‘나’라는 중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침은 도구일 뿐, 본질은 그가 자기 자신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수진은 무릎 위에 진료일지를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정말 사람을 살리고 싶구나.”
수진은 마음으로 알았다.
그의 삶과 사랑은 결국, 누군가를 품는 일이었다.
그날 밤, 수진은 그에게 편지를 건넸다.
“당신이 침을 놓지 않아도, 나는 당신의 마음에 기대어 회복되었어요.”
그 말이, 묵직하게 승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의원 베란다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건기가 끝나갈 무렵, 수진은 작은 잎이 달린 열대 식물 스킨답서스를 심었다.
“이 잎들은 오래 가요. 가지를 길게 뻗으며 더운 날씨에 물을 조금만 주어도 잘 살아갈 거예요. 이 식물을 보면 우기를 기다리는 그런 끈질긴 기다림이 떠올라요.”
승윤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도 그렇게 견뎠나요?”
“그래요. 그 견뎌냄으로 이젠 알아요. 견디는 시간은 혼자서도 이겨낼 수 있지만, 살아가는 시간은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요.”
"아. 누구에게나 그런 기다림이 있나 봐요.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승윤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함께 살아가면 어떨까요? 사실 매일 절실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오래도록 걷기만 했다.
말이 없어도 마음이 닿는 감각 그것은 침술치료처럼 기혈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