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다. 그것도 적은 양이 아니다. 우중 산행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대부분 출발할 때는 비가 별로 오지 않아서 출발했다가 산행 중에 비를 만난 경우가 많았다. 전국에 그런 상황이니 어디로 비를 피해 장소를 변경할 수도 없어서 원래 계획대로 백암산을 가기로 했다.
백암산은 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가 있는 산이다. 단풍철이 되면 단골로 찾던 곳이라 가을에만 익숙한 곳이다.
적어도 몇 백 년은 넘은 오래된 매화. 선암사의 선암매, 화엄사의 흑매, 오죽헌의 율곡매와 더불어 백양사의 고불매를 문화재청에서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4대 매화로 2007년에 지정했다고 한다.
선암매를 보고 난 뒤 광양 매화와 구례 산수유 여행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 지난주. 이번에는 백양사의 고불매를 보기 위하여 봄에 백암산을 가보기로 한 것이다.
서울서 전남 장성까지는 3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라, 일어나자마자 재빨리 아침용 샌드위치를 준비하여 새벽 6시 반에 집에서 출발했다. 가는 동안 오락가락하는 비와 친구하고, 휴게소 주차장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백양사 입구 도착한 때가 아침 10시쯤. 차에서 내리니 우산이 필요한 정도의 비가 오고 있었다. 백양사만 들를까 하다가 산행을 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백양사는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주차장이 꽤 넓다. 주차비 4,000원만 지불하면 어느 주차장에 차를 세워도 상관이 없다. 입장료(1인 4,000원)까지 12,000원의 비용이 들었다.
우리는 가인 야영장 가까이에 주차를 하고 비 오는 것을 겁내지 않는 캠퍼들의 텐트를 감상하면서 백양사를 향해 걸었다.
숲길이 끝날 때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쌍계루다. 가을 단풍철에만 보다가 처음으로 단풍이 없는 풍경 속의 쌍계루. 밤새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물의 양이 많다. 잔잔하게 호수 같아 반영을 선사하던 약수천이 사진 작가들로 북적이던 징검다리를 집어삼킬 듯 넘쳐흐른다.
각진 대사(비자나무를 심은 스님이다.)가 지팡이를 꽂았더니 큰 나무가 되었다는 이팝나무는 아직 겨울이지만, 대표 나무인 단풍나무를 비롯한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여기저기 새싹을 내밀며 봄 준비에 한창이다. 물을 충분히 얻었으니, 따뜻한 봄 햇살에 물오른 가지들을 맘껏 펼칠 준비가 되었으리라.
절 마당으로 들어서니 아침 예불 중인지 스님의 불경 소리와 목탁 소리가 마당 가득이다.
우선 매화나무를 찾았다. 붉은빛 꽃몽오리를 잔뜩 가지마다 매달고 있는 고불매가 눈에 들어온다. 좀 이른 모양이다. 만개하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주변에 심어놓은 청매화, 홍매화는 활짝 피어 다행이다. 오래된 매화라 피는데 좀 더 시간이 걸리는가 싶다.
천연기념물 제486호. 수령 350년으로 추정하고 있는 매우 오래된 나무다. 1863년에 절을 100m 정도 옮겨지으면서 원래 있던 곳에서 홍매 한 그루와 백매 한 그루를 옮겨 심었는데, 홍매만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에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을 기리자라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백양사 부근에는 비자나무가 많다. 이 또한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받아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데, 백양사 주변을 비롯하여 백암산 지역에 총 7,000여 그루 이상이 자생하고 있다니 대단한 규모다. 고려시대 각진국사란 스님이 당시 구충제로 널리 사용되던 바자 열매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심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이렇게 아름다운 숲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스님의 좋은 뜻이 우리에게까지 값진 보물로 이어진 셈이다.
비자 열매로는 구충제 등 의학 재료뿐이 아니라 식용유를 얻기도 하고, 목재로는 건축, 가구, 조각 재료, 바둑판 만들 때도 유용한 재료라고 하니 참 쓰임새가 많은 나무다.
비가 많이도 왔나 보다. 높은 곳에는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이 작은 폭포를 그려내고, 개천은 여름날 계곡물처럼 힘차게 흐른다. 운문암으로 가는 길도 포장되지 않았으면 걷기 힘들 정도로 물이 흐르는 구간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산행객은 우리뿐이라 여유롭긴 하다. 비가 서서히 그치는 것 같아 우산은 접었다.
백양사에서 보았을 때 구름 속에 싸여 신비롭던 백학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위험한 구간이라 4월 30일까지 출입금지다.
운문암 쪽으로 더 가서 산을 올라가기로 하고 걷는데, 뜻밖의 반가운 얼레지 무리를 만난다. 빗속이라 꽃몽오리를 채 펴지 못한 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산길을 걷다가 이렇게 야생화를 만나는 일은 정다운 친구를 만나는 만큼이나 반갑다.
계단을 오른다. 산은 이미 안개 속이다. 아니 오를수록 구름 속인가 싶다. 아래에서 보면 가끔 산 위에 구름이 둘러싼 것을 볼 때가 있는데, 우리가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다.
앞에 길이 있는 줄 아니까 길 잃을 염려는 없겠지만, 날씨는 이미 곰탕 수준이다. 산 위에서 출발한 물길은 물살이 거세다. 물길을 건널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물길을 지나 상왕봉으로 오를 계획을 세웠던 우리는 이쯤에서 하산하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 아까보다는 시야가 맑아졌다. 산 위는 구름 속인데. 아까 보았던 얼레지를 다시 찾아보았다. 배시시 벌어진 꽃봉오리가 반가워 다시 찍어보았다.
되돌아오는 길에 쌍계루 옆길에서 반가운 야생화를 또 만났다. 아까는 보지 못한 현호색이 한쪽 기슭에 빽빽하다. 아마 쌍계루 쪽 풍경만 살피느라 놓친 모양이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꽃이지만 무리 지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가인 야영장에 도착하여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했다.
산을 오르다가 여의치 못해서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이번처럼 날씨가 문제가 되었을 때도 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럴 때 걸어온 길을 아까워하지 않고 되돌아올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산행은 내 수준만큼만 하면 된다. 정상에 오른다고 해서 누가 상 주는 것도 아니지만, 오르지 못한다고 해서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욕심은 화를 불러일으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기회는 또 있는 법이 아닌가. 다시 오르면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과가 쉽게 나타나지 않아 힘이 들 때, 칠전팔기로 성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 그런 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 길은 얼마든지 있는데, 이제껏 걸어왔다고 해서 계속 나아가야만 하라는 법은 없다. 그럴 때 되돌아설 수 있는 용기는 계속 나아가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인생에서 되돌아 나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산행 중에 되돌아 나오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은 이유다.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