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민둥산 억새 이야기
민둥산은 정선에 있다. 제천 지나 영월 거쳐 태백 가기 전에 위치한, 정선 카지노에 가까이 있는 산이다. 워낙 그곳 지형이 산지이다 보니까 천고지가 넘는데도 그렇게 높은 줄 몰랐는데, 높이가 1,119m나 된다고 한다.
민둥산이란 나무가 없는 산을 뜻한다. 이름처럼 산 정상에는 나무가 없고, 드넓은 주능선 일대가 모두 억새 군락지다. 억새가 많은 것은 산나물이 많이 나게 하려고 매년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화전민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민둥산에는 다른 산과 달리 땅이 움푹 꺼져 있는 곳이 많다. 민둥산의 암석은 얕은 바다에서 퇴적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빗물에 쉽게 녹는 석회암의 성질 때문에 땅이 웅덩이처럼 꺼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생기는 대표적인 카르스트 지형을 '돌리네'라고 한다. 우리말도 있다. '발구덕'은 둥글게 움푹 꺼져 들어간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민둥산 주변인 정선군 남면 무릉리에 발구덕마을이 있다.
민둥산을 처음 갔을 때 그 감동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뭐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 가장 진하게 남는 것 같다.
푸른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갈대의 춤사위는 낮은 지대 사람이 사는 평범한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높은 산 위의 향연이다.
은빛이 나는 시기가 있다. 억새가 피기 시작할 때 은은한 회색빛이 날 때가 있는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 우리 눈에 은빛으로 빛나게 된다. 그 시기를 지나면 억새는 차츰 갈빛을 더 많이 띠게 된다. 첫해 민둥산을 올랐을 때 신비스러운 은빛 억새의 빛깔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꼭 화려한 빛깔의 꽃이어야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억새 군락지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또 보고 싶어, 오르고 오른 것이 열세 번쯤이다. 작년에도 갔었는데, 올해 또 이맘때쯤에 어김없이 민둥산에 오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꽃산 산행이 그렇듯이 갈 때마다 항상 최상의 모습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산행 앨범을 확인해 봤더니, 반 이상이 흐린 날씨 산행이었다. 어느 해에는 억새가 전만 못하기도 하고. 첫해 만났던 은빛 억새, 그 화려한 장관은 그 뒤로 참 만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곳에 올라가야 볼 수 있는 억새 군락지 민둥산 산행은 갈 때마다 즐겁고 만족스러웠다. 여러 코스가 있고, 코스마다 아기자기 재미있는 오르내림과 볼거리들이 풍부하여 걷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민둥산 산행 코스는 5개 코스가 안내되어 있는데, 이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증산초교 들머리 코스와, 삼내약수 들머리 코스를 자주 애용했다. 최단 코스로는 능전마을 들머리 코스가 있는데, 능전마을 주차장까지 차로 올라와서 약 1시간 정도만 걸으면 정상에 닿을 수 있어서 부쩍 찾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가벼운 옷차림에 물 한 병들고 산책하듯 걸어가는 사람들도 여러 번 만났다.
이번 산행에 우리는 증산초교에서 정상을 간 다음, 갔던 길로 되돌아오지 않고 발구덕마을(능전마을) 쪽으로 내려와 거북이쉼터를 거쳐 증산초교로 돌아왔다. 대략 8km 정도의 거리다.
양평에서 아침 6시에 출발, 강원도 여행 때마다 늘 하듯이 치악 휴게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증산초교 아래 주차장에 주차를 한 다음, 9시가 되기 전에 등산을 시작했다.
초입부터 약간 가파른 편이지만, 중간쯤에는 경사가 심하지 않다. 올라가는 길에 지팡이로 쓸만한 나뭇가지들이 많이 쌓여있었다. 스틱이 필요한 구간이 있기 때문에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멀리서 보고 그쪽 등산로를 막아놓은 줄 알고 다른 길로 올라갔다가, 나중에 내려올 때 확인을 하고는 웃었다.
조금 올라가면 급경사, 완경사로 나눠져 있는 길이 나온다. 급경사가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우리는 완경사를 선택했다.
아직은 푸름이 가득한 여름 숲길이다. 기온은 이미 가을의 문턱이라 서늘하여 가을 등산복을 꺼내 입었다. 한여름 숲길이 보기는 좋지만 걸으려면 땀과 벌레와 싸우며 걸어야 하는데, 이런 쾌적한 날씨에 푸른 숲길을 걸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여전히 야생화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숲길을 벗어나면 파란 하늘이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에 들어와 안긴다. 아침에 차 타고 오는 내내 안개가 자욱하여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늘이 맑아 다행이다. 민둥산 산행에 이런 날씨 만나기 쉽지 않다. 살짝 단풍 든 나뭇잎과 파란 하늘에 가을을 느낀다.
감국과 산국은 매우 비슷하다. 인터넷에 구별법을 검색해 봤더니, 100원 동전보다 큰 것이 감국, 작은 것이 산국이라고 한다. 주로 산에 많이 피는 작은 노란 꽃은 대부분 산국이라니까, 이 꽃도 산국인가 보다. 꽃이 아주 작은 편이다.
민둥산이라지만, 억새가 있는 8부 능선 전까지는 나무가 울창한 숲이다. 등산로만 아니면 원시림 같은 느낌이다.
중간 지점에 있는 임도를 지나서 다시 숲길을 간다. 등산로를 정비한 듯 길이 약간 바뀌고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억새 군락지를 만난다. 작년에 공사하던 임도가 널찍하게 조성되었다. 정상에 가려면 위로 올라가야 하지만 새로 뚫린 임도로 걷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억새다.
하늘과 구름과 억새! 또 하나의 조연은 바람이다. 억새는 바람을 만났을 때 드디어 춤추는 무용수가 된다. 정말 바람이 심할 때는 억새가 바람을 따라 드러눕는데, 그럴 때는 나도 억새가 된 것처럼 함께 바람을 타기도 한다. 이번에는 바람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 따라 억새도 산들산들 가볍게 춤을 춘다.
쉼터에서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점심 해결하고 돌리네를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간다.
뒤돌아 민둥산 정상을 멀리서 일별 하고,
다시 억새 숲길을 지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 울타리 숲길에 오면 늘 가슴이 뛴다. 참나무숲의 푸른 잎이 만들어주는 그늘 사이로, 가장 자연 친화적인 통나무 울타리가 만들어내는 풍경 때문이다. 숲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만들어낸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냥 보이는 그림이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숲에서 참 눈이 밝다. 녹색 사이로 뭔가 색다른 빛이 보이면 발을 멈추고 살핀다. 이번에는 용담이다. 보랏빛 예쁜 색이 내 눈에 띈 것이다. 용담은 과남풀보다는 작고, 구슬붕이보다는 큰 편인데, 셋 다 색깔과 꽃 모양이 비슷하다. 과남풀은 꽃봉오리가 벌어져있지 않고, 구슬붕이는 매우 작은 꽃이다.
내려가기 전에 돌리네 중심부 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예전에는 위험해 보여서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지나갔는데, 작년에 공사를 하더니 진입로를 만들어 놓았다.
돌리네 연못에 도착하였다. 원래 물이 없었는데, 작년에 공사를 하더니, 인공 연못을 만든 것 같다.
어떻게 자연적으로 이렇게 땅이 깔대기 모양으로 꺼질 수 있는지. 싱크홀과는 좀 다르다. 싱크홀은 그 구멍 넓이만큼만 아래로 꺼지는 현상이지만, 표토층은 그대로 있고, 그 아래의 지층에 석회암이 녹으면서 천천히 아래로 꺼진 것 같다. 가운데 구덩이를 중심으로 산 등성이 전체가 경사진 모양으로 아래로 쏠려있어, 어떻게 보면 커다란 꽃잎 모양이다. 웅덩이에 인공 연못을 만들어 놓으니, 화산의 분화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관목을 일부러 심었는지, 자생인지 아래쪽을 향하여 무늬가 생겨서 특이했다.
돌리네에서 올라온 다음, 발구덕 마을 쪽으로 하산한다. 우리는 능전주차장 쪽으로 가지 않고 증산초교 쪽으로 가야 한다.
미국쑥부쟁이도 모여 피니까 멋지다. 자주색 강아지풀을 처음 보았는데, 아마 열매를 맺은 것인가 보다.
돼지감자는 아는데, 돼지감자꽃을 잘 알지 못했다. 삼잎국화와 꽃이 거의 비슷하지만, 잎이 해바라기와 닮았다. 집 텃밭에 삼잎국화가 있어서 이번에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키가 꽤 큰 편이다. 번식력도 대단하다고 한다.
새벽이슬로 키우는 고랭지 민둥산 배추밭이다. 수확이 끝난 밭도 있었고, 무름병이 왔는지 수확을 포기하고 내버려 둔 밭도 있었다. 기후변화는 농작물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거북이 쉼터 주변, 집이 몇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 발구덕마을인 모양이다.
어찌 보면 곰이나 공룡을 닮은 듯한 바위가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바위의 구멍은 아마 석회암이 녹은 흔적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는 배추밭 사이에 있는 밭두렁으로 걸었는데, 등산로를 새로 말끔하게 만들어서 좋았다. 길도 넓고,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감사했다.
발구덕에서 증산초교까지는 1.4km다. 이정목에 마을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라고 써서 정겨웠다. 이 등산로도 알려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게 될 것이다.
멋진 억새 군락과 신기한 돌리네, 아기자기 재미있는 등산로를 따라 기분 좋은 산행을 했다. 그런데, 하산할 때 너무 가파른 곳에서 무리를 했는지, 발가락이 아직도 많이 아프다.
좀 쉬었다가 회복되면 다시 산행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