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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새 Dec 07. 2023

대청호 오백리길을 걷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 호반낭만길


"내가 호수를 좋아하나 봐."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 들머리에 들어서면서 남편이 말한다.

"강, 호수, 바다. 물을 좋아하는 것 같아."

 왜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냥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차분해진단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호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되리라 짐작해본다.

 며칠 날씨가 영하를 맴돌더니, 오늘에사 반짝 영상의 기온을 찾는다. 이때다 하고 걷기길을 찾아보다가 대청호를 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갔던 곳을 계속 찾는 경향이 있다. 그곳을 찾아 멋진 풍경과, 그곳에서 힐링을 맛보았을 때의 느낌을 마음과 머리가 기억하고, 다시 그 감동을 느끼기 위해 그곳을 찾는 것이다. 소백산도 수십번, 선자령도 매년 찾다시피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대전 근처에는 참 다닐 곳이 많다. 숙소로 애용하던 장태산자연휴양림을 비롯해서, 산행으로는 대둔산, 계룡산을 여러 번 갔다. 대청호를 끼고있어서  대청호 오백리길도 여러 코스를 걸었다. 한 때 대전으로 우리의 새 둥지를 계획해 봤을 정도로 대전을 좋아했지만, 딸이 사는 곳과 1시간 이내의 거리 조건에서 탈락되었다. 양평보다 따뜻하고, 교통이 좋아 전국의 산을 다니기 좋다는 점에서 아직도 미련이 많이 남는 곳이다. 다시 집을 짓는다면? 아마 대전 근교를 찾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 나이가 좀 많다. 이번 집을 짓는 일도 많이 늦었다는 생각이다.

 겨울이면 사실 전국의 경치가 다 비슷비슷하다. 나무는 잎을 전부 떨어뜨린 나목의 상태이고, 간혹 초록의 침엽수들이 빈틈에 살짝살짝 지루하지 않도록 끼어있으며, 전체적인 톤은 당연히 갈색톤이다.

꽃은 끝물의 시들어가는 모습으로 안간힘을 다해 색조를 남겨 놓기도 하고, 조금만 기온이 높아지면 간혹 푸른 색을 뾰족뾰족 내밀기도 한다. 하지만 거대한 갈색 색조에 파묻혀 존재감이 약하다.

 대신 겨울의 경치는 뜻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인다. 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들이라니. 나뭇 가지의 아름다움은 누군가 계획한 조형미가 아니다. 사랑하는 해를 향해 가지를 뻗었고, 자신의 분신인 나뭇잎들이 광합성을 위한 햇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분재처럼 인간의 의도가 배제되고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또한 가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겨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청명한 하늘 색깔이다. 겨울에는 다른 계절에 비해 맑은 날이 많기는 하지만, 우리도 겨울의 호수를 보기 위해서는 맑은 날이 언제인지 인터넷 검색을 한다.

바람이 심할 까봐 든든하게 내복을 챙겨입고 왔는데, 바람이 거의 없었다. 호수의 반영을 보기 좋은 날씨이기도 했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모두 21구간까지 지정이 되어있다. -1까지 포함하면 모두 26코스나 되는 매우 다양한 걷기길이다. 남편은 이곳 4구간이 가장 아름답다면서 4구간을 자주 오는 이유를 댔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의 들머리는 대청호반 자연수변공원이다. 주차장이 넓다.

자연수변공원

 자, 시작이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도로를 건너서 호수 가까이 바짝 다가간다. 하늘의 푸른 빛이 그대로 물 속에 내려앉은 푸른 빛의 호수에 내 마음을 맡겨본다. 너의 그 깊은 속이 어디까지더냐? 내가 힘들고 어려워서 마구 울어대어도 충분히 담아줄 만큼 충분히 깊더냐. 너른 호수 넓이 만큼 네 팔도 충분히 안아주리라.

반갑다. 푸른 하늘도 반갑고, 푸른 호수도 반갑고, 갈색 숲 언저리 멀리 보이는 녹색 침엽수도 반갑다.

 은행나무다! 수피만 보고도 은행나무를 구별한 건 꽤 오랜 일이다. 잔 가지가 달린 모양도 특이해서 금세 알아볼 수가 있다.

 "지난 가을, 노랗게 물들었으면 주변이 환했겠네."

 맞장구 쳐줄 생각은 안 하고, 떨어진 은행 열매에서 구린내가 난다고 투덜거린다. 은행은 이미 과육에서 탈출하여 반질반질한 열매의 껍질을 드러낸 것이 많다. 주울까? 하니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 뭘 주워~. 은행 열매 구린내를 싫어하는 이 사람은 고급이고 몸에 좋대도 은행을 안 먹는다.  우유팩에 껍질 째 넣어 잘 막은 다음 전자렌지에 돌리면 쉽게 익혀 먹을 수 있는데. 아쉽지만 걷기길 시작부터 투닥거릴 수 없어서 에라, 내가 지자 하고 바로 포기한다.

 호수가 하는 말

 안아줄게요.

 들어줄게요.

 함께 할게요.

 너무나 크나큰 슬픈 일이 생겨서, 어떤 사람들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그저 꺼억 꺼억 울고 싶어질 때,

 대청호 호수를 찾아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대면 이렇게 안아주고, 들어주고, 함께 해 줄 것이 틀림없다.

 이름도 예쁜 추동 가래울 마을에서 오른 쪽 호수 수변을 따라 만들어진 데크길로 가면 된다. 호수랑 친구 하며 걷자.

 출발하자 마자 있는 벤치는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다. 반대 방향에서 오는 이들에게는 오래 걸은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하는 오아시스 쉼터가 되겠지.

 이미 높이 뜬 해가 호수에 길게 윤슬을 만든다. 그 윤슬이 우리를 따라 다닌다.


 대나무는 겨울에도 녹색을 잃지 않는다. 대나무가 만들어주는 작은 숲에 위로를 얻으며 길을 걷는다. 오솔길을 간다.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을 생각보다 빨리 만났다 했더니, 물이 많아서 길이 잠겼단다. 횡성호수길에서도 주차장이 잠길 정도로 수량이 많았는데, 여기도 그런 모양이다. 이제 시작인데. 망설이고 있는데, 남편은 계속 길을 걷는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과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는지, 만들어진 길이 보였다. 길은 열 사람만 걸어도 새길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아는가. 학교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놓고 절대로 못 지나가게 지키고 섰어도 열 명을 못 막으면 길이 만들어지고 그 길은 절대로 잔디로 덮이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길이 잠겨있었다.

끝까지 갈 수나 있을까? 하지만 끝까지 갔다. 가끔 남의 선산에 난 길을 미안한 마음으로 걷기도 했지만, 목적한 곳까지 다 걸었다.

 갈색으로 꼬시라진(표준어는 고스러진이다. 하지만 어감이 다르다. 그냥 사투리로 쓰겠다.) 나뭇잎에서도 남편은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나 보다.

 빈의자에 눈이 시리다. 저 의자에 앉아 몇 시간이고 호수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슬픔을 풀어내는 어느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을 것도 같다.

너무나 슬퍼서 꺽꺽 울다 보면 가슴 명치 끝에서 통증이 온다. 가슴이 아프도록 울어본 사람은 진정한 슬픔과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다가 실컷 울고나면 아무도 아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기분이 나아진다. 이것을 눈물의 카타르시스라고 하던가. 학창 시절에 배운 말이지만. 아니다, 눈물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통곡의 카타르시스라고 해두자.

 반영이다! 슬픈 마음을 녹이는 것 중에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치료약이 있다. 너무나 슬퍼서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 뻔 한 나를 일으켜 세워 준 것은 전원주택으로 이사간 지인이 집들이로 우리 팀을 초대했을 때 경험했다. 자연의 힐링을 복용하는 한 우울증의 깊은 늪으로 빠지지 않는다. 내가 전원주택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 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 경험이 계기가 된 건 맞다.

 더 걸어가니, 길이 물 속으로 들어가서 아예 통행 할 수 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남의 선산을 지나갔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선산이라니. 영혼이 정말로 산소에서 떠나지 않고 자고 있다면, 그 영혼은 정말 우울증을 모를 것 같다. 아니 영혼이 알 리는없으니, 성묘하러온 자손들이 슬픔을 거두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나무의 키가 두배가 되었다.

 나뭇가지가 반영으로 게 모양이 되었다. 자연의 위트다. 그 뒤로 거대한 게를 구경하러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 아무리 달려도 자기 키의 4배가 넘는 게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다.

 빈 의자만 있고, 길은 없다. 다 물속에 잠겼다. 대청호  호수 속에도 수몰된 마을이 있겠지. 왁짜지껄한 마을이었을까? 고즈녁한 마을이었을까?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고,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이 있었을 텐데, 모두 물.속.으로 통일 되었다. 호수만 남았다.

호수는 아는 지 모르는지 평화롭고, 은은하기까지 하다.

 거울 같은 호수에 바람이 없을 때는 반영이 생기는 당연한 자연현상인데도, 마냥 신비하다. 호수길을 걸으면 내가 유난히 반영을 찍으라는 요구를 많이 한다. 반영은 바람의 배려로 호수와 산,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은 호반낭만길이라고 불린다. 슬픈연가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 드라마가 2005년에 방영된 것이라고 하는데 2년만 더 있으면 20년이 넘는다. 드라마의 힘이 오래 간다.

 길을 찍으라고 했다. 오래되어 단단하게 굳은 길을.

 오늘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임시 산길을 걸으면서 때로는 나뭇가지의 방해를 받기도 하고 무너져 내리는 흙에 발이 미끄러질 뻔한 일도 있었다. 욕심내어 사진을 찍으러 호수 가까이로 갔던 남편도 잘못 걸었는지 아프다고 한다.

길은 열 사람만 걸어도 새길이 생긴다고 했지만, 이렇게 단단한 길이 생기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야 한다. 간혹  새로 길을 만들면서 작은 굴삭기를 산으로 끌고와서 다지기를 하는것을 본 적 있지만, 이렇게 단단한 길을 만들지 못한다.

 나는 내 길을 잘 만드는 중일까. 짧지 않은(상대적인 것이다.) 세월을 살아오면서 희로애락의 인생 살이 속에서 많은 일들과 씨름을 하고, 고민도 하고, 극복도 하고 그래서 단단해 지고 있는 중일까. 꿈을꾸고 계획하는 시간보다,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더 많은 우리 나이에 걸맞게, 잘 살아내야겠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다.

 어느 분이 메리골드라고 이름을 붙인 기념관을 남긴 모양이다. 큰 온실로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도꼬마리인 것 같다. 검색해 보니 맞다. 등산 장갑에 슬쩍 붙였다가 떼어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도꼬마리를 본 적 없이 교과서 사진만 보고 가르쳤다. 도꼬마리는 찍찍이의 원조다.

 갈대와 하늘을 찍어보았다.

 겨울에는 억새가 꽃이다.

 물속 마을의 정원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대로 물속이다. 우물도 물 속에 있다.

 슬픈 연가 촬영지기 이곳이다.  2005년에 방영된 이후, 창궐, 7년의 밤, 역린 등 여러 편의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대부분이 어두운 영화다. 밤에 많이 촬영했을 것 같은 제목의 영화들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밤에는 으스스한 곳으로 변하는 것일까.

 친구들끼리 여행온 듯, 꺄르르 웃음소리가 수변을 채운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 주체할 수 없는 행복함을 사진 속에 가득 담아, 추억의 장소에 차곡차곡 끼워놓으려 함이 틀림없다.  갖가지 포즈를 지으며 한바탕 퍼포먼스에 바쁜  그들의 떠들썩함이 조용하기만 하던 호수 위로 거침없이 퍼져나간다.

 시끄럽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남편에게, "우리 팀도 모이면 저렇게 떠들어."라고 대신 변명해준다. 여고시절의 친구들일까. 자주 못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것일까. 마치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르 웃는 여고생들처럼 웃음 소리가 경쾌하다. 중년의 나이는 잊은지 오래인 듯 하다.

 겨울에 여행하기 좋은 걷기길이라는 소개글이라도 떴나. 방문객들이 꽤 많았다. 이곳만 와도 충분히 힐링이 될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한옥 정원을 테마로 만든 작은 꽃밭. 눈요기감이다.

 아이들 솜씨로 보이는 새집도 많이 보였다. 체험 활동을 했나보다.

  아래로 굽어진 가지도 온 힘을 다해 다시 끌어올려 살아냄에 성공한 나뭇가지의 모습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다. 나무도 온 힘을 다한다. 사람도 그래야 한다!

 쉼터는 쉬라고 있는 것. 준비해 온 간식은 여기서 풀었다. 따뜻한 차 한잔과의 짧은 휴식은 걷는 자에게 주어진 행복한 여유다.

 청둥오리가 많이 보였다. 이렇게 많은 청둥오리를 한 장소에서 보는 일은 드물다.

 마산동 쉼터에 도착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숲해설가와 함께 온 단체 방문객을 만났었다.

 입구에 메리골드가 가득했던 이곳이 무슨 건물일까 했더니, 카페란다. 커다란 유리온실도 있었다. 약학박사 류영은님의 기념관으로 마을공동 공판장, 체험 활동 등 마을을 위한 다양한 장으로도 제공되는 모양이다.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도착 정보 없음. 카카오 택시를 부르니 오겠다는 택시가 없다고 나온다. 에라 걷자. 도로 변으로 가면 시간이  많이 단축되겠지.

  30분 정도 걸어서 출발점에 도착하였다.

 아까는 무심코 지나간 자연수변공원에 메타세콰이어가 멋지게 단풍이 들어 있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 걷기를 끝냈다. 총 7.5km, 3시간 10분 걸렸다.(20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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