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지
길은 느리고 조금 천천히 깨어난다. 그래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길을 느껴야 한다. 길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걷다 보면, 이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지난날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마음의 화살표를 따라가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왔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설득당하기 시작한다. 지난날의 어느 길에 아직도 울고 있는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있다.
엄마의 장롱 거울을 깨고 몰려오는 두려움에, 잔볕이 남아있는 볏짚 속에 숨어서 잠들었던 대여섯 살의 계집아이가 그렁한 눈으로 손을 잡는다. 그 경험은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기억 속에 웅크리고 있다. 작고 말랑말랑한 손을 꼭 잡아주며 괜찮다고, 너의 호기심으로 지금 내가 명랑하게 잘살고 있다고, 잘했다고 토닥여 준다.
올리브 농장이 있는 산 하나를 넘는다. 프랑스 부부는 역방향으로 걷는다. 가도 가도 올리브 농장이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친구를 못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