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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행

(2025년 시산맥 봄)

by 연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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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지


나는 허베이성에서 가장 입이 큰 사람

세상사 떠도는 말 중에서 내 편인 말만 가려듣지


린통으로 사람들이 날아들어

나는 당신들을 모르지만, 당신들은 나를 아는 척

지루한 삶이 닿는 곳마다 줄은 길어지고 세상의 경계가 오므라든다는

설득력 있는 여행객이지

사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은 날들이 겹겹이 쌓여 습하고 어둑해


나는 오랫동안 사자들이 진을 친 어둠 속에 살았지

하지만 여긴 아직 은밀한 나의 성읍


화살이 나를 미행하는 줄도 모르고 순회하다 사구궁에서 병사를 당했지

나를 모해하는 저들의 입술에 조롱거리가 되어 여러 번 진나라를 떠나온 사람


무덤을 넓게 썼다고 욕하는 전라도 사투리가 이제는 알아들을만 해


종이를 태우듯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 이후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세상의 부귀영화가 무색한

조용한 죽음이었지


무덤은 누군가의 옆자리보다 먼 구석을 보는 사람의 등이 따뜻한 자리

천사들의 조수인 한 여자가 묘혈에 잠자는 자들을 건드리며 몇몇 혼령들과 대화하는 시안


원래 네가 사는 세상은 속고 속이는 곳


냉랭하게 그냥 지나가 비처럼

보이지 않는 미행을 두리번거리면

주춤거리는 걸음을 알아챈 미행에 덜컥, 그 후는 알 수가 없어


병마총의 병사들 아직도 슬픔의 눈동자를 굴리고 있어


나는 허베이성에서 가장 목이 긴 사람

기린처럼 짧은 잠을 자는 진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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