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2025
이집트를 떠나며 아쉬움과 설레임, 잠깐이었지만 어느새 친해져버린 새로운 친구들과의 추억을 뒤로했다. 그리고 나폴리와 몰타, 지금은 로마의 한 호스텔의 주방 한 귀퉁이에 겨우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과 슈퍼에서 산 못생긴 살라미를 역시 못생기게 잘라놓고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내 시야에 들어오는 이색적인 풍경들에 대한 놀라움이나 감정이 가라앉으면 어김없이 아빠라는 입에 담기도 어색한 단어가 떠오른다.
오늘은 혜진이와 함께 걸으며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있다가 문득 과하게 배려를 하는 게 아닌가 하며 물 한통을 들어달라며 건네어줬다가는 다시 받아서 들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은 내 모습에 실망감이 들기도 한다. 나는 과연 우리가 맞이 할 이 아이에게 어떤 아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이다. 준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준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닌 걸 알지만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네 친구였던 한 친구가 생각이 난다. 우리가 군대를 갓 제대하곤 학교를 복학하던 시기에 그 때 그 친구가 사귀던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다. 잘 생각해 보라며 조금 비관적이던 나에게 그 아이를 꼭 나을 거라고, 아이를 낫는게 행복이라고 잔뜩 감정적이 되어 말을하던 그 친구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쯤 고등학생은 되었을 아이와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마지막 만남을 끝으로 우리의 관계또한 일방적으로 끊겼고 계속 해외로 돌던 나는 우연히 만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도저히 못참고 보험도 적용이 안되는 데도 불구하고 산부인과를 다녀왔다. 이제 4주 6일차라는 말을 듣고 임신을 하기는 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려도 전혀 알 수 없는 초음파 사진을 받아보았다. 아직 심장이 생기지도 않은 상태라서 3주정도가 지나고 다시 초음파를 찍어야 한다고 하니 아직 혜진에게 말은 안했지만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은 물건너 간 것 같다. 크리스마켓정도만 보곤 한국에 가야하겠다.
지금 여기 이 호스텔 주방 한 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보면 십년이 지났지만 변한거라곤 통장에 잔고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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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은 흘러버렸고 행복하면서도 지긋지긋했던 유럽여행은 이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몇몇 인상깊었던 장면들과 어렴풋한 그 때 당시의 느낌만 남기고 지나버린 과거가 되었다. 며칠 전 한국에 들어왔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혜진의 병원에 가는 일이었다. 입국을 하고 처제네 집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피로에 잠시 침대에 기절하듯 누워있다가 부리나케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다. 8년여만에 느끼는 한국의 겨울은 니트에 롱코트만 걸치면 괜찮았던 이탈리아나 프랑스 날씨에 비해 날카로울 정도로 차가웠다.
우리는 병원에 도착해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의사선생님은 예상이라기보다는 마음 한 켠에 큰 두려움이었지만 혜진과는 일부러 가볍게만 나눴던 유산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를 했다. 추가적인 혈액검사를 해야지 조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고 50/50의 가능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방안에 있던 간호사를 포함한 우리 둘다 그 말이 어떤 말인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저 혜진이 괜찮을까, 이후로 몸이 안좋아지지는 않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심장도 없었던 수정체였기 때문에 아이를 잃었다는 표현도 맞지 않았고 내 상실감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단지 우리가 지난 한달동안 해왔던 얘기들과 부모로써의 마음가짐, 앞으로의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부분들에 있어서 아쉬움이라고 말하면 조금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첫 진료 후 이틀이 지나고 다시 한 번 혈액 검사를 하고는 수술 날짜를 잡고 병원을 나왔다. 몸으로 모든 것들을 느끼고 입덧까지 했던 혜진이 받아들이는 게 나와는 또 많이 다를거라는 생각에 본의아니게 계속 눈치를 보며 혜진의 몸상태를 살피고 있다. 유산이라는 무서운 단어는 어릴적 들었을 때는 마치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이가 되니 주변에서 유산에 대한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만큼 우리 나이가 들었고 유산이라는 게 과정의 일 부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처음 이 안식년을 계획 했을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 시간들을 품어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