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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남 카라 Oct 08. 2024

3. 할배의 좌충우돌 유나 육아 이야기

  할배는 자신이 손주의 육아를 담당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녀들에게 우리 집은 할매가 부실해서 애들 돌봐주기가 어렵다고 일찌감치 선언을 하기도 했고, 딸에게도 육아는 금전적인 지원 등 간접 지원만 하겠다고 미리 선을 그어놓은 상태였다. 설령 가끔씩 손주들을 볼일이 있어도 그건 할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할매가 힘들어하면 그때 할배가 함께 도와주는 것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을 봐도 할배가 손주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할배들이 자신들의 역할은 손주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 놓았기 때문이리라. 설령 피치 못하게 할배들이 손주를 돌보는 경우에도 손주 육아를 담당한다는 것이 남자 체면이 안 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을 아끼는 것 같다. 하지만 할배는 남의 눈치나 체면을 그리 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실용 주의자다. 해야 된다는 생각만 정리되면 집중하고 몰입하는 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할배의 손주 육아는 어찌 보면 할매보다 유리한 면이 많이 있다. 안아주거나 목욕을 시킬 때, 유모차를 끌고 밖에 나갈 때 등 아이 무게를 감당하기에 근력 있는 할배들이 유리하다. 그리고 할배들이 손주 육아를 자신들이 할 역할이라고 생각만 하면 직장의 업무 경험을 살려 육아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잘 할 수 있다. 다만 할배들이 육아에 필수적인 정서적 공감의 배경인 상황판단 능력이 좀 떨어지고 손주 육아나 집안일을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뿐이다.


  수렵채집기나 오랜 농경문화에서 손주의 육아나 교육에 할배들이 주도적으로 동참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모들은 사냥이나 먹거리 채집에 집중했을 것이고 할매들은 식사 준비에 바빴을 것이다. 이러한 역할분담을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마도 할배들이 일정 부분 손주들의 육아나 교육에 참여했을 것이다. 다양한 세상 경험과 성숙함을 갖추고 있으면서 먹거리 마련과 준비에서 여유가 있었던 할배들이 손주 육아와 교육에 적합했을 것 같다.


  암튼 할배에게 유나 육아는 회사에서 기존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은 그런 기분이었다. 딸과 할매에게 모든 걸 하나하나 새로 배웠다. 처음에는 기저귀를 거꾸로 채워서 '딱 보면 기저귀가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모르나요'하는 의미심장한 할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분유 타는 법, 분유 물 온도 맞추는 법, 분유 먹이는 법 등을 신입사원처럼 새로 배웠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유나 안아주는 것도 낯설고 어색 했었다.


  하지만 할배는 회사에서 멀티로 다양한 일을 수행해 본 업무 경력자다. 유나 육아나 집안일은 회사일에 비하면 복잡도나 난이도 면에서 비교 대상이 아니다. 단지 단순 반복적이어서 약간 지루함이 느껴진다는 것이 최대 단점이긴 했다. 사위로부터 본격적인 유나 육아 바통을 넘겨받은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이런저런 눈총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좌충우돌하던 할배는 이제 우리 집에서 최고의 유나 육아 돌보미로 등극했다.


  딸도 할매도 유나가 울고 보채면 할배를 찾는다. 할배가 안으면 신기하게도 울며 보채던 유나가 울음을 뚝 그친다. 남자들이 상체가 발달해서 아이를 안정적으로 안아서 그렇다는 딸의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하고 할배가 유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안아줘서 그런 것도 같다. 안아주기, 울음 달래기, 재우기, 목욕시키기 등에서 할배는 초보 딱지를 떼고 점차 실력 발휘를 하고 있다. 할배가 할 일이 있어서 집을 온종일 비우기라도 하면 딸과 할매의 표정이 걱정으로 잠시 어두워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한다. 평생을 해야 할 일 속에 파묻혀서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의 삶 속에서 중요한 일과 시급한 일을 의외로 잘 구분하지 못한다. '지금 이 시점에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뭐지?'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는데 시급하게 처리할 일에만 매몰되어 있는지 등을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중요한 일의 기준은 뭘까? 중요한 일은 보통 의미 부여와 가치 부여가 동시에 일어난다. 의미 부여가 일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 준다면 가치 부여는 일에 대한 만족감과 관련이 있다. 중요한 일은 당위성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일이 끝난 뒤에 만족감과 충만감을 느끼면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할배는 24년 7월 현재 시점에 나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뭘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할배 앞에 놓인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많았다. 브런치에 내비게이션 시리즈를 시작했고 글쓰기를 궤도에 올려놓고 싶은 생각도 욕심도 많았다. 하지만 어떤 일은 뒤로 미뤄서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어떤 일은 뒤로 미루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 일도 있다. 유나 육아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브런치에  글쓰기를 뒤로 미루어진다고 해도 유나 육아에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나 육아처럼 의미 부여와 가치 부여가 동시에 되는 일은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배도 유나 돌보기도 당위성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나가 오히려 할배에게 풍성한 만족감을 주고 있다. 유나의 천진난만하게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 생각 없이 푸르른 산의 정취에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이때 나는 무아지경의 현존을 느낀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잘되던 목소리는 사그라들고 할배에게 평온함이 몰려온다. 유나가 아앙하고 울면서 머릿속 목소리가 다시 할배 삶에 왕 노릇하기 전까지 할배는 유나를 통해서 깊은 충만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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