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의 지향점이 자아도취가 아니라 인식의 생산에 있어야 하며, 좋은 삶의 지향점은 나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 나름은 열심히 살아본답시고 해온 것들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공허함으로 돌아오는 때가 있다. 피터싱어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저서에서 시지프스의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시지프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두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는 시지프스 스스로가 바위를 굴리려는 강한 욕망을 갖게 되는 것, 둘째는 밀어올린 바위들을 가지고 신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내적 욕망, 주관적 의미의 부여를 강조하는 입장은 첫째 방법을 옹호한다. 반면 싱어의 입장은 둘째에 해당한다. 싱어는 자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소모적이며, 진정한 자아를 보증해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현실 세계에서 요구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아의 온전한 실현은 그 테두리를 벗어나 더 큰 이상을 추구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중 윤리적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러한 삶에 헌신하는 것은 다른 이익에 대한 헌신과 달리 아무리 성찰해도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자신의 칼럼에서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의 첫 책 <커밍 업 쇼트>(부제: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에 대해 소개하며 이렇게 썼다. '... 과거의 불행을 극복하고 자아를 강화하는 과정을 '성장'이라고 평가하며 제 삶도 그렇게 서사화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일수록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내 불행의 근원인 가족을 비판하고, 세계에 불만을 품는 또래 청년들을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철없는 이들로 폄하한다. 이들의 고통은 고독하기까지 하다. ...'
나 역시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이 단지 내면의 승인에 머물러 있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나 자신만의 자유에 골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소설 <데미안>의 결말에서 데미안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 하에서 전장으로 나가 싸우는 선택을 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이 책의 결말으로서 합당할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너무 거창해서도 안될 것이다. 지나온 궤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문장을 쓰는 것 역시 좋은 글, 좋은 삶을 향한 토대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행위는 자신의 삶을 건강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고, 그런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문장을 구사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할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영원히 이때를 그리워하게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때, 혹은 이미 지나갔으나 내가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이 문득 깨달아지는 때에. 어느 봄날에 내리던 옅은 빗방울과 평온한 적막, 어느 여름날 호숫가에 가득하던 풀벌레 소리와 끈적한 습도와 초록빛으로 우거진 흙길, 어느 가을날에 내리쬐던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축구하는 소리 같은 것들을 생생하게 꺼내놓고 나면, 나는 지나가버린 시절 속에만 머무는 사람과 순간에 대한 왈칵 솟구치는 그리움을 안고도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사랑할 수 있다.
오랜만에 비가 내려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그쳤다. 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쳐버린 소나기가 아쉽지만, 비가 그친 뒤에 저멀리 들려오는 새소리, 군데군데 고여있는 물웅덩이, 조금씩 개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