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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ul 09. 2022

실패 변주곡-8

그 남자와, 세 번째 만남

 어느 때와 다름없이 방 한구석에 숨어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맥없이 풀어져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길게 낸 자국 끝에 종이조각 하나가 떨어져 빛나는 것이 보였다.


[소솜]

'내가 일하는 찻집이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다면 언제든 와도 돼.'

그 골목에 줄지어 있던 수많은 예쁜 찻집 중 하나일까.

그때 그 남자가 건넨 하나의 선택지. 나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딸랑-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것 같은 소박한 공간. 그 골목의 찻집 중에서도 작아 잘 보이지 않는 공간에 그가 있었다. 슬쩍 눈이 마주치자 그가 "안녕, 잘 지냈어?"하고 덤덤한 인사를 건넨다. 나도 슬쩍 목례를 했다.

나는 한쪽 구석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가까이 놓인 난로의 온기가 따듯하다.


"마시고 싶은 것 있어?" 남자가 물었다.

비 오는 날 마셨던 커피의 향기가 떠올랐다.


"따듯한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릴게요."




 약간 어두운 실내에 비쳐 드는 흰 빛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선반에 아기자기 정리된 다기들이 예쁘다.

이윽고 실내에 커피 향이 퍼진다. 김이 솔솔 나는 황색 커피가 내 앞에 놓인다. 남자는 말없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스스로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왜 이곳에 왔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이 입안에 맴돈다. 가끔 타닥타닥 하며 난로 타는 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말을 고르느라 제법 긴 시간을 흘려보냈다.


"저 자신을 돌보라고 하셨는데 잘 못하겠어요... 제가 아직도 너무 미워요."


말이 목에 턱, 턱 걸렸다. 자칫 감정이 터져 나와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던 나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남자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 가치는 누가 부여하는 걸까? 누가 부여한지도 모르는 가치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미워하게 되었을까."


남자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유도하며 말을 이었다.

"눈을 밖으로 돌려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실은 말야"

책상 위에 놓여있던 예쁜 그림의 엽서 한 장을 높이 들어 올린다.

"이게 다야."

그리고 땅으로 팔락, 팔락 추락하는 그림.

"공중에 무언가를 놓으면 떨어지지."

그리고 엽서를 다시 주워 든다.

그는 엽서를 살짝 말아 가볍게 공중으로 던져 올린다.

"힘을 가하면 다시 공중에 있게도 되지."

다시 자리에 앉아

"커피에서는 향이 나지. 햇살은 빛나고, 난로는 따듯하고, 너와 나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들리고. 그게 다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해."

 재도전은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속하는 것일까.

 "......"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려?"

인정하면 나 자신에게 지는 것 같았다.

 "그럼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든 이상을 성취해 낼 수 있을 것 같니?"

솔직히, 아니었다.

 "아니라고 말해버려. 못한다고, 성실하지 않다고, 약하고 의지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버려.

네가 생각해보지도 않은 가치로 스스로를 속박하지 마. 어떤 이미지나 이상 속에 너를 가두지 마. 결국 그건 네가 깨고 나와야 할 껍질이 될 뿐이야.


세상을 느끼면서 자유롭게 살아가."


맞다.

사실은 나에게 따스하게 느껴지는 햇살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또, 나는 이상 속의 나를 사랑했다.

아냐, 그건 내가 아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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