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교사회의가 열린다. 선생님들이 한데 모여서 반별 분위기, 학사일정, 각자의 고민을 의논한다. '요즘 XX학생이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컴퓨터가 고장 났는데 빨리 고쳐달라', '청결상태가 요즘 불량하다. 날 잡아서 대청소를 했으면 좋겠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진도 어디까지 나갔느냐' 등 사뭇 진지한 의견 교환이 벌어진다. '수업에 조금씩 늦게 오는 선생님들이 있는데, 반복되면 가만두지 않겠다', '공용 컴퓨터에 누가 게임 깔아놨냐?' 교무 선생님의 무서운 잔소리도 들린다.
야학활동을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났나? 처음으로 교사회의에 참석했다. 평소에는 나와 같은 요일에 수업하는 선생님들만 오며 가며 만나다가, 교사회의가 되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 신입이었던 나는 말로만 듣던 베테랑 선생님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날이었다.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긴장이 된다. 그중 가장 궁금한 선생님 G를 만났다. 어학연수를 다녀오느라 야학을 1년 쉬었다가 최근에 복귀했다고 한다. 야학 선생님들이라고 모두가 두루 친한 게 아닌데, 선생님 G는 내가 만난 모든 선생님들이 그를 자주 인용했다. '이 자료는 선생님 G가 영국 가기 전에 만들어뒀던 자료', '선생님 G가 제안해서 만들어진 야학의 규칙' 등 존재감이 큰 사람이었다. 교사회의에서 만난 그는 평범한 복학생 이미지를 가진 공대생이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반가워요.'라고 그가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당시 야학은 교사 대부분이 대학생이라, 심적으로 대선배라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봤자 나보다 서너 살 많은 정도였지만.
교사회의 뒤 이루어지는 뒤풀이. 대패삼겹살 집에서 어색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선생님 G는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전공은 뭔지, 집은 어딘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두런두런 주고받으며 소주도 한 잔, 두 잔 들어간다. 선생님 G는 사람과 편하게 대화하는 것 말고 재주가 하나 더 있었다. 술을 자연스럽게 잘 권한다는 것. 30분쯤 지났더니 술에 취해 졸고 있는 날 발견했다. 억지로 누가 맥인 건 아닌데, 얘기를 하면서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취해버렸다. 졸다가 일어나 보니, 구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국어 선생님을 놀리는 중이었다. 친하지도 않았던 내가 '그게 요즘 유행하는 그 환승인가요? ㅋㅋㅋ'라는 둥 눈치 없는 농담을 했다가 다른 선생님들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강제 귀가조치 되었다. 지금 그렇게 술주정을 하면 진상이겠지만, 24살은 용납이 된다. 그렇게 하나의 흑역사를 쓰고 나니, 도리어 야학에서 동료 선생님들을 대하는 게 편해졌다. 이미 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선생님 G는 내 뒤로 온 신입교사들한테도 같은 작전을 반복했다. 처음 보는 뒤풀이 자리에서 새로 온 선생님을 취하게 만들어서 당황시킨다. 술을 이용해서 마음의 벽을 낮춰준다. 선생님들끼리 유대관계가 있어야 활동도 오래 할 수 있다. 힘들 때 서로 의지하고 갈 수 있다. 선생님 G는 이런 걸 염두하고 그렇게 술을 맥인 게 아닐까.
야학은 술자리가 잦다. '선생님들도 밤에 술을 마시며 인생을 배우는 게 야학일까'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있었던 두 군데 야학 모두 그랬다. 할 거 없는 선생님들은 괜히 수업이 아닌 날에도 야학에 와서 어슬렁 거린다. 그러다가 수업이 끝난 선생님들을 잡아채서 인근 술집으로 데려간다. 주로 시장 안에 있는 노포들이 우리들의 공략 대상이다. 비싸지 않으면서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집. 수업을 마치면 빨라도 오후 10시라서, 일찍 문을 닫는 집을 애초에 탈락이다. 그러다 보니 국밥, 삼겹살, 호프집은 우리의 주요 공략대상이다. 어쩌다가 좋은 술을 구한 선생님이 있으면 교실에서 마시다가 자기도 한다. 술자리는 건설적인 얘기로 시작한다. '요즘 수업 어때요?'라는 화두를 던진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솔직 발칙한 고민이 나온다. 마음에 안 드는 학생 얘기라던지, 수업 방향에 대한 고민, 시간표를 바꿔줄 수 있냐는 개인적인 부탁까지.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야학이야기는 집어치우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청자는 없고, 말하는 사람만 가득하다. 하는 얘기도 맨날 똑같은 얘기. 가족 얘기, 성적 얘기, 이성친구 얘기, 드라마 얘기, 취미 얘기. 저번에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고. 그래도 별로 안 지겨운 게, 그다지 진지하게 듣지를 않는다. 그냥 5.1 채널로 지방방송이 공간을 감싼다. 집에 가고 싶은 선생님이 '저 먼저 갈게요'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오디오가 끊기지를 않아 한 시간을 기다려 겨우 발언권을 잡은 적도 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본인이 더 우월한 선생님이라고 자랑하기 시작했다.
A : "저번 시험 평균점수가 어느 과목이 제일 높았죠? 바로 사회죠? 이번에 학생 세분이나 합격한 건 내 덕인줄 아세요."
B : "선생님 그거 아세요? 학생들이 선생님 수업 잠 온다고 싫어하는 거? 요즘 한두 분씩 결석하지 않으세요? 본인을 좀 돌아봐요."
C : "B야, 네가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냐. 네가 수업한 나눗셈 그거 이해 못 하겠다고 학생들이 난리야. 국어 선생님인 내가 나눗셈을 수업시간에 하는 게 이게 맞는 거니?"
D : "당신들은 진심이 없어. 내가 만든 교재 봤어? 당신들 말이야. 어머님들한테 시중 교재 쓰게 할 거야? 우리 실정에 딱 맞는 교재를 만들어라 좀. 정성을 들여라고."
무례한 말 대잔치가 벌어진다. 야학 밖에서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한다? 욕먹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용인이 된다. 그 순간, 어른 같아 보였던 선생님 G도 거든다.
"내가 말이야. 아프리카에서도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쳤던 사람이야. 니들 수업 복도에서 들어보니까, 아직 멀었어. 수업 좀 더 신경 써야겠더라?"
미담의 주인공, 교사회의에서도 안건을 주도하던, 새로운 선생님들이 올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던 선생님 G도 주정뱅이였잖아?
가급적 야학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다. 구성원이 아니면 관심이 없는 이야기라서다. 내 친구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내가 야학에 매주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때는 지인들에게 같이 봉사활동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보통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푸념만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없는 건 시간이 아니라 의지인데. 야학에 출석하는 학생들도, 봉사활동 하는 선생님들도 시간이 많아서 오는 사람은 없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야학 선생님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서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학생들을 위한 고민을 나눈다.
"요즘 하영 씨가 수업에 집중을 못하시던데.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구체적으로 말씀은 안 하시는데,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제 수업에서도 풀이 죽어 계시더라고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저라도 수업 때 애교를 좀 부리고, 칭찬도 많이 해드려야겠어요."
이렇게 학생을 위한 얘기를 하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또 머저리 같은 소리를 해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서로 욕하기도 한다. 이렇듯 맨날 하는 얘기 또 하는 주정뱅이들의 모임.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그 모임에 제 발로 가게 된다. '이 양반 또 시작이네. 술 좀 줄여요!'라고 핀잔을 주면서 오늘도 한 잔 하러 같이 가는 거지. 이 사람들이 아니면 야학 얘기를 어디서 공감받을 수 있겠나. 나를 낳은 엄마조차도 야학이야기는 알아듣지를 못할 건데. 우리끼리 부둥켜안고 으쌰으쌰 하는 거지. 오랜 인연들보다도, 야학에서 만난 동료 교사에게 큰 영감을 받곤 한다. 나는 언제부터 야학이 내 일상에 착 스며들었을까? 아마도 이런 술자리가 어색하지 않기 시작했을 때. 그때부터 '진짜 야학의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