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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야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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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Jun 28. 2024

한밤의 주정뱅이들

※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한 달에 한 번, 교사회의가 열린다. 선생님들이 한데 모여서 반별 분위기, 학사일정, 각자의 고민을 의논한다. '요즘 XX학생이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컴퓨터가 고장 났는데 빨리 고쳐달라', '청결상태가 요즘 불량하다. 날 잡아서 대청소를 했으면 좋겠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진도 어디까지 나갔느냐' 등 사뭇 진지한 의견 교환이 벌어진다. '수업에 조금씩 늦게 오는 선생님들이 있는데, 반복되면 가만두지 않겠다', '공용 컴퓨터에 누가 게임 깔아놨냐?' 교무 선생님의 무서운 잔소리도 들린다. 이런 분위기에서 첫 참석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저 선배들의 토의를 지켜보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야학활동을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났나? 처음으로 교사회의에 참석했다. 평소에는 나와 같은 요일에 수업하는 선생님들만 오며 가며 만나다가, 교사회의가 되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 신입이었던 나는 말로만 듣던 베테랑 선생님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날이었다.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긴장이 된다. 그중 가장 궁금한 선생님 G를 만났다. 어학연수를 다녀오느라 야학을 1년 쉬었다가 최근에 복귀했다고 한다. 야학 선생님들이라고 모두가 두루 친한 게 아닌데, 선생님 G는 내가 만난 모든 선생님들이 그를 자주 인용했다. '이 자료는 선생님 G가 영국 가기 전에 만들어뒀던 자료', '선생님 G가 제안해서 만들어진 야학의 규칙' 등 존재감이 큰 사람이었다. 교사회의에서 만난 그는 평범한 복학생 이미지를 가진 공대생이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반가워요.'라고 그가 먼저 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당시 야학은 교사 대부분이 대학생이라, 심적으로 대선배라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봤자 나보다 서너 살 많은 정도였지만.



  교사회의 뒤 이루어지는 뒤풀이. 대패삼겹살 집에서 어색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선생님 G는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전공은 뭔지, 집은 어딘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두런두런 주고받으며 소주도 한 잔, 두 잔 들어간다. 선생님 G는 사람과 편하게 대화하는 것 말고 재주가 하나 더 있었다. 술을 자연스럽게 잘 권한다는 것. 30분쯤 지났더니 술에 취해 졸고 있는 날 발견했다. 억지로 누가 맥인 건 아닌데, 얘기를 하면서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취해버렸다. 졸다가 일어나 보니, 구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국어 선생님을 놀리는 중이었다. 친하지도 않았던 내가 '그게 요즘 유행하는 그 환승인가요? ㅋㅋㅋ'라는 둥 눈치 없는 농담을 했다가 다른 선생님들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강제 귀가조치 되었다. 지금 그렇게 술주정을 하면 진상이겠지만, 24살은 용납이 된다. 그렇게 하나의 흑역사를 쓰고 나니, 도리어 야학에서 동료 선생님들을 대하는 게 편해졌다. 이미 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선생님 G는 내 뒤로 온 신입교사들한테도 같은 작전을 반복했다. 처음 보는 뒤풀이 자리에서 새로 온 선생님을 취하게 만들어서 당황시킨다. 술을 이용해서 마음의 벽을 낮춰준다. 선생님들끼리 유대관계가 있어야 활동도 오래 할 수 있다. 힘들 때 서로 의지하고 갈 수 있다. 선생님 G는 이런 걸 염두하고 그렇게 술을 맥인 게 아닐까.

 

 의외로 야학은 술자리가 잦다. '선생님들도 밤에 술을 마시며 인생을 배우는 게 야학일까'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있었던 두 군데 야학 모두 그랬다. 할 거 없는 선생님들은 괜히 수업이 아닌 날에도 야학에 와서 어슬렁 거린다. 그러다가 수업이 끝난 선생님들을 잡아채서 인근 술집으로 데려간다. 주로 시장 안에있는 노포들이 우리들의 공략 대상이다. 비싸지 않으면서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집. 수업을 마치면 빨라도 오후 10시라서, 일찍 문을 닫는 집을 애초에 탈락이다. 그러다보니 국밥, 삼겹살, 호프집은 우리의 주요 공략대상이다. 어쩌다가 좋은 술을 구한 선생님이 있으면 교실에서 마시다가 자기도 한다. 술자리는 건설적인 얘기로 시작한다. '요즘 수업 어때요?'라는 화두를 던진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솔직 발칙한 고민이 나온다. 마음에 안 드는 학생 얘기라던지, 수업 방향에 대한 고민, 시간표를 바꿔줄 수 있냐는 개인적인 부탁까지.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야학이야기는 집어치우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청자는 없고, 말하는 사람만 가득하다. 하는 얘기도 맨날 똑같은 얘기. 가족 얘기, 성적 얘기, 이성친구 얘기, 드라마 얘기, 취미 얘기. 저번에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고. 그래도 별로 안 지겨운 게, 그다지 진지하게 듣지를 않는다. 그냥 5.1 채널로 지방방송이 공간을 감싼다. 집에 가고 싶은 선생님이 '저 먼저 갈게요'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오디오가 끊기지를 않아 한 시간을 기다려 겨우 발언권을 잡은 적도 있다.


 맨날 하는 얘기 또 하는 주정뱅이들의 모임.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그 모임에 제 발로 가게 된다. '이 양반 또 시작이네. 술 좀 줄여요!'라고 핀잔을 주면서 오늘도 한 잔 하러 같이 가는 거지. 이 사람들이 아니면 야학 얘기를 어디서 공감받을 수 있겠나. 나를 낳은 엄마조차도 야학이야기는 알아듣지를 못할 건데. 우리끼리 부둥켜안고 으쌰으쌰 하는 거지. 나는 언제부터 야학이 내 일상에 착 스며들었을까? 아마도 이런 술자리가 어색하지 않기 시작했을 때. 그때부터 '진짜 야학의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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