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야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룰루 May 29. 2024

80점을 향해서

※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선생님 수업은 솔직히... 듣고 있는데 좀 지루했어요."


 내 첫 수업에서 동료교사에게 들은 피드백이었다. 야학의 정식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 교사들 앞에서 수업시연을 한다. 10분가량 교사들 앞에서 수업을 한 후, '이 정도면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도 되겠다'라는 선배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수업시연은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다. 괜히 동료들이 날 평가한다고 생각하니 평소에 하지 않는 긴장을 한다.


 내가 야학에서 처음 맡았던 과목은 중등 과학. 과학은 제일 자신이 없는 과목이었으나, 공석이 이것밖에 없었다. 다른 과목에 자리가 생기면 내가 과목을 바꾸는 조건으로 과학을 맡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평소에 관심이 없는 걸 잘 가르칠 수 있을 리가 없다. EBS 교육방송 좀 틀어보고, 교과서를 대강 암기해서 하는 수업이 얼마나 잘 진행될까. 내 시연수업을 참관한 교무 선생님은 '지루하다. 학생들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라.'라고 평했다. 이날 선배 선생님들의 합평은 '어떻게 하면 수업 시간 80분을 잘 끌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 가며 교재연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수업을 시작했다. 절대 지루해서는 안 되는 반이었다. 내가 처음 맡은 학급에는 은율 씨가 있었다. 나이는 대략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굵고 거친 그의 손을 보아하니, 힘으로 먹고사시는 분 같았다. 20~30분 이분과 같이 얘기하다 보면, 이 분이 여느 어른들과는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지적장애가 아니었을까 싶다. 통 집중을 못하신다. 이분에게 수업에서 조금이라도 얻어가게 하려면 흥미를 유지시켜야 한다. 가장 중요한 내용 하나를 위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나가야 할 진도는 산더미다. 가르치다 보면 쉼 없이 달리게 된다. 조바심 탓이다. 3주쯤 수업을 했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의 목적이 과연 내가 교과서 모든 내용을 말하는 것일까? 학생들의 머리에 입력을 시키는 게 나의 과제가 아닐까? 진도를 모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검정고시는 60점을 넘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모든 걸 다 수업할 필요가 있을까. 너무 어려운 내용, 시험에 자주 나오지 않는 내용은 건너뛰는 작전을 취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나의 목표는 80점이다. 20점을 위한 공부는 과감히 생략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은 학생들과 좀 더 교감하는 데 사용한다. 중요한 내용을 한번 더 가르칠 짬이 생겼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를 만들었다. 은율 씨도 중간중간 쉬어가는 시간이 있으니 그럭저럭 포기하지 않고 출석을 하셨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공부를 생각해 본다. 괜히 어려운 내용을 알려드려 혼란을 주지 말자. 가급적 친숙한 내용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 20년가량 활동하신 수학 선생님 수업이 문 너머로 들린다. '여러분 이제 김치찌개를 한번 만들어봅시다.'라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난데없이 수학수업에서 무슨 찌개를 끓인다는 것일지. 궁금해서 귀동냥을 해봤다.


 "어머님들, 한 번도 김치찌개를 안 끓여봤다고 생각해 봐요. 재료가 있다고 그냥 끓여져요? 레시피가 있어야죠. 그 레시피를 똑같이 따라 하면 어때요? 맛있는 요리가 완성되죠? 수학도 똑같아요. 이 공식에 그대로 숫자를 집어넣어 보는 거예요. 그러려면 이 공식을 레시피처럼 들고 다니세요. 공식이 기억 안 나면 펼쳐서 다시 봐도 좋아요. 그렇게 여러 번 하다 보면 김치찌개처럼 안 보고도 수학 문제를 술술 풀게 되죠."

   

 어째서 근의 공식이 도출되는지는 강조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지 않을까, 수학을 만만하게 취급할까만 고민한다.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같은 공부를 반복하면서 얻어낸 그만의 지혜다. 야학과 정규학교의 교육방식이 여기서 차이가 난다. 우리는 1등을 만들지는 못한다. 어려운 문제는 틀릴 수밖에 없다. 대신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도록 데리고 가는 게 목표다.




 80점은 비단 우리 학생들에게만 요구하는 건 아니다. 나의 요즘 삶의 목표도 80점이다. 가끔 사무실에서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나 스스로 척척 일을 하고 싶은데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이 일을 한 지 4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해결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80점 전략'을 상기한다. 100점일 필요가 있나? 80점만 받아보자. 목표를 80점으로 잡으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가 못하는 건 도움을 받고, 실수를 저질렀으면 솔직히 말하고 수습한다. 그러면 100점은 못 맞아도, 사고 치는 건 면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80점도 충분히 잘한 거다. 100점짜리 결정을 하려다 아무것도 못한다. 일단 80점에 도달한 뒤에 90점, 100점을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험생의 반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