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야학의 정식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 교사들 앞에서 수업시연을 한다. 10분가량 교사들 앞에서 수업을 한 후, '이 정도면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도 되겠다'라는 선배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수업시연은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다. 괜히 동료들이 날 평가한다고 생각하니 평소에 하지 않는 긴장을 한다.
"선생님 수업은 솔직히... 듣고 있는데 좀 지루했어요."
내 첫 수업에서 동료교사에게 들은 피드백이었다. 하긴, 그때 내 수업은 내가 생각해도 지루했다. 내가 야학에서 처음 맡았던 과목은 중등 과학. 과학은 제일 자신이 없는 과목이었으나, 공석이 이것밖에 없었다. 다른 과목에 자리가 생기면 내가 과목을 바꾸는 조건으로 과학을 맡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평소에 관심이 없는 걸 잘 가르칠 수 있을 리가 없다. EBS 교육방송 좀 틀어보고, 교과서를 대강 암기해서 하는 수업이 얼마나 잘 진행될까. 내 시연수업을 참관한 교무 선생님은 '지루하다. 학생들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라.'라고 평했다. 이날 선배 선생님들의 합평은 '어떻게 하면 수업 시간 80분을 잘 끌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 가며 교재연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수업을 나가기 시작했다. 절대 지루해서는 안 되는 반이었다. 내가 처음 맡은 반에는 학생 두 분이 계셨다. 은율 씨와 영희 씨. 은율 씨는 대략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굵고 거친 그의 손을 보아하니, 힘으로 먹고사시는 분 같았다. 20~30분 이분과 같이 얘기하다 보면, 이 분이 여느 어른들과는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일상적인 대화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조금만 깊은 얘기를 하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수업도 통 집중을 못하셨다. 그래서 어려운 개념 설명을 이어가기 버거웠다. 이분에게 수업에서 조금이라도 얻어가게 하려면 흥미를 유지시켜야 했다. 가장 중요한 내용 하나를 위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하나를 알려줘도 뇌리에 빡 꽂히도록 만들어줘야 했다. 영희 씨는 우리 주변에 보이는 보통의 엄마였다. 가끔은 수업을 재밌어하시고, 가끔은 지루해하셨다. 그래도 내 수업에 맞장구를 잘 쳐주시고, 예전에 배운 걸 기억 못 할 때면 나에게 미안해하셨다. 영희 씨는 아이들을 키우고 계셔서 결석이 잦으셨다. 공부를 하고 싶은 의지는 있으나, 형편상 마냥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육아 난이도 높은 학생들과의 수업은 쉽지 않았다.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나가야 할 진도는 산더미다. 가르치다 보면 쉼 없이 달리게 된다. 조바심 탓이다. 한 달쯤 수업을 했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의 목적이 과연 내가 교과서 모든 내용을 말하는 것일까? 학생들의 머리에 입력을 시키는 게 나의 과제가 아닐까? 진도를 모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검정고시는 60점을 넘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모든 걸 다 수업할 필요가 있을까. 너무 어려운 내용, 시험에 자주 나오지 않는 내용은 건너뛰는 작전을 취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나의 목표는 80점이다. 20점을 위한 공부는 과감히 생략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은 학생들과 좀 더 교감하는 데 사용한다. 중요한 내용을 한번 더 가르칠 짬이 생겼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를 만들었다. 은율 씨도 중간중간 쉬어가는 시간이 있으니 그럭저럭 포기하지 않고 출석을 하셨다. 이제는 '아 내는 모르겠다'라며 파업하듯 귀를 닫지는 않으셨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공부를 생각해 본다. 괜히 어려운 내용을 알려드려 혼란을 주지 말자. 가급적 친숙한 내용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 20년가량 활동하신 수학 선생님 수업이 문 너머로 들린다. '여러분 이제 김치찌개를 한번 만들어봅시다.'라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난데없이 수학수업에서 무슨 찌개를 끓인다는 것일지. 궁금해서 귀동냥을 해봤다.
"어머님들, 한 번도 김치찌개를 안 끓여봤다고 생각해 봐요. 재료가 있다고 그냥 끓여져요? 레시피가 있어야죠. 그 레시피를 똑같이 따라 하면 어때요? 맛있는 요리가 완성되죠? 수학도 똑같아요. 이 공식에 그대로 숫자를 집어넣어 보는 거예요. 그러려면 이 공식을 레시피처럼 들고 다니세요. 공식이 기억 안 나면 펼쳐서 다시 봐도 좋아요. 그렇게 여러 번 하다 보면 김치찌개처럼 안 보고도 수학 문제를 술술 풀게 되죠."
어째서 근의 공식이 도출되는지는 강조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지 않을까, 수학을 만만하게 취급할까만 고민한다.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같은 공부를 반복하면서 얻어낸 그만의 지혜다. 야학과 정규학교의 교육방식이 여기서 차이가 난다. 우리는 1등을 만들지는 못한다. 어려운 문제는 틀릴 수밖에 없다. 대신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도록 데리고 가는 게 목표다.
요즘 국어 수업을 할 때는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자, 이 글을 보세요. 읽지 말고 그냥 쓱 보세요. 글이 설렁설렁하죠? 종이를 끝까지 다 쓰지도 않았는데 다음줄로 넘어가죠? 이것은 운문입니다. 다음 글은 어때요? 빽빽하죠? 이건 산문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운율이 느껴지면 운문', '정형화하지 않고 풀어쓰면 산문'이라고 가르쳤다. 놀라울 정도로 학생들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체 이걸 왜 어려워하는지 좌절하다가, 이제 그냥 상스럽게 수업하기로 했다.
"자 이 글을 10초만 훑어보세요. 도통 머리가 아파지는 단어가 많죠? 인공지능, 미술의 역사 같이 재미없는 단어가 많으면 비문학입니다. 그럼 다른 글을 볼까요. 엄마, 할머니, 철수 같이 인물이 많이 나오죠? 그리고 인물들의 이야기인 거 같고요. 이건 소설이에요."
이렇게 가르치면 학생들은 100점은 받지 못한다. 야매니까. 그래도 80점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80점은 비단 우리 학생들에게만 요구하는 건 아니다. 나의 요즘 삶의 목표도 80점이다. 가끔 사무실에서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나 스스로 척척 일을 하고 싶은데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이 일을 한 지 4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해결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80점 전략'을 상기한다. 100점일 필요가 있나? 80점만 받아보자. 목표를 80점으로 잡으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가 못하는 건 도움을 받고, 실수를 저질렀으면 솔직히 말하고 수습한다. 그러면 100점은 못 맞아도, 사고 치는 건 면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80점도 충분히 잘한 거다. 100점짜리 결정을 하려다 아무것도 못한다. 일단 80점에 도달한 뒤에 90점, 100점을 생각한다.